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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리안이 뺏아간 처녀들..
조선시대때 짜장들에게 공납되던 처녀들..
일제치하때 납치해간 처녀들..
우리나라에 미녀는 없는거냐!!
모두 개씹 좆잡놈 남상 인거냐!!!!
이게 나라냐!!!!
피곤하다04:35:08목록으로 건너뛰기
짤은 화성 탐사선에서 보내온 지구의 모습이다. 지구가 마치 작은 점처럼 보인다. 인류 역사 300만년간, 모든 사람들이 저 작은 점 안에서 태어났고 죽었다. 위대한 지도자들도,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저 점 안에서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현재 저 작은 점 안에서 먹고 살기위해 아둥바둥 치열하게 싸우는 우리들도 언젠간 죽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 것일까?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서 왔으며, 죽고 나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이런 질문들은 아마 인류 등장 이래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며, 우리가 아는 한 아직까지 여기에 대해 밝혀진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질문일지라도, 몇몇의 천재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연구해왔으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답에 대해 나름대로의 "썰"을 풀어왔다. 오늘은 수천년 전 인도의 지식인들이 이 질문에 대해 어떠한 나름대로의 썰을 풀어왔는지 다루어 보겠다. 불교 철학은 애초에 그 뿌리를 힌두교, 혹은 브라만 교에 두고 있으므로 먼저 브라만 교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할까 한다.부족한 점은 댓글로 지적 바람. 1. 브라만 교 (후일 힌두교) 현재 힌두교의 모태가 되는 브라만 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 자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현대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 몸의 세포들은 약 7년을 주기로 모두 교체된다. 즉, 7년 전 내 몸속의 세포들 중에서 오늘 내 몸에 남아있는 세포는 한 개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와 7년 전의 나는 다른 사람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지인은 7년동안 나를 보지 못했더라도 나를 알아볼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렇다면 그 지인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오늘의 나와 7년 전의 나를 동일한 인물이라고 판단하나? 브라만 교에서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바로 아트만이라는 개념에서 찾으려 했다. 아트만이란 물질에 구애되지 않는 나의 본질, 가장 순수한 나 자신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혼의 개념과 비슷하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7년마다 바뀌지만 나를 이루는 나의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다. 이로인해 사람들은 7년만에 나를 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죽더라도 나를 알던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추억할 것이다. 아트만은 물질적인 내 육체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완전하고 순수한 아트만은 불완전하고 열등한 신체에 갇혀있다. 그러므로 브라만 교에서는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을 통해 순수한 아트만을 불완전한 육체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하며 내 호흡을 관찰하다보면,마치 나의 존재가 거대하고 크나큰 우주를 이루는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혹은, 우주의 은하나 행성들과 같은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를 경외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브라만 교에 따르자면) 모두 우리의 순수한 아트만이 육체를 초월할 때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우리는 고된 삶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기분을 느낀다. 아트만이 육체를 초월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법칙에 한발짝 더 다가갔기 때문이다. 지구보다 훨씬 거대한 행성들과 더욱 거대한 항성들이 수천억 개씩 모여있는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법칙"을 브라만이라고 이름붙였다. 따라서 브라만 교에서는 끊임없는 명상과 수행을 통해 나 자신은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임을 깨달으라고 강조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아트만은 곧 브라만"이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범아일여. 범(브라만)과 아(아트만)은 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행을 통해 범아일여의 진리를 깨닫고 미개한 육체가 호소하는 삶의 고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나의 육체에 집착하지 말고, 나의 아트만을 똑바로 직시해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아트만은 우주의 일부분임을 깨달아라. 그럴 때에 우리 인생의 고달픔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인도 철학 (브라만 교 철학)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과연 브라만 교의 가르침이 삶의 고됨을 이겨내는 데에 충분할까? 조용히 명상을 하다보면 내 스스로가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삶에 대한 고난이 조금 해소되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명상을 끝내고 눈을 떠보면 다시 우리는 복잡한 일상의 소용돌이에 던져진다. 다시 바쁘게 일을 해야하고, 빚이 있다면 갚아야하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한다.즉, 범아일여의 효과는 명상을 그만두는 즉시 효력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어떻게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인도 변방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브라만 교의 범아일여 사상을 반박하며 새로운 가르침을 설파한다. 이것이 바로 초기 불교의 모습이다. 잠시 쉬었다가 이어서 써 보겠다.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