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절반의 권력을 향유코자 하는 평범한 지도자였다면 미국의 휴전 요구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을까. 더욱이 좌파 학자들의 견해대로 이승만이 미국의 에이전트(앞잡이) 였다면 미국의 휴전 요구에 대한 그의 저항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떤 이유 건 이승만이 미국의 휴전 요구를 순순히 수락했다면 휴전 문제에 관한 이승만의 꽃놀이패(이승만으로서는 휴전이 안되면 북진통일로 나아갈 수 있어서 좋고 휴전이 되더라도 반대 급부를 얻어낼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고단위 대응수에 의해 당시의 한미 관계는 한국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꽃놀이패 형상을 띠게 됐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전쟁 기간 동안 이승만이 미국에 대해 취한 가장 강력한 대응수는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다.
휴전 회담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6월18일 새벽 2시. 송환 반대 한국인 포로, 속칭 반공포로들이 수용돼 있던 부산, 마산, 광주, 논산 등의 포로 수용소에서는 국군 헌병들이 난사하는 카빈 총소리를 신호로 2만7천여명의 반공포로들이 철조망을 뚫고 대탈출을 시작했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 석방의 서곡이었다.
휴전조인 직전에 이뤄진 이승만의 이 대담한 조치는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 모두에게 찬물을 끼얹는 기습이 아닐 수 없었다. 양측 다 이로 인해 휴전협상이 깨질까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언제부터 반공포로 석방 이라는 카드를 구상했고 어떤 루트를 통해 이를 실행에 옮겼는가.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제7권에는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한 상세한 대답이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함께 실려 있다. 이승만은 최소한 53년 초부터 포로석방을 구상했던 듯하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구상을 이무렵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처음 말한데서 간접적으로 입증된다. 당시 헌병 총사령부 총무처장이었던 문종욱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53년초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이 원용덕 장군을 부르더니 반공포로들을 자유롭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나라는 아주 함축성있는 말씀을 했데요.
원 장군은 이 얘기를 듣고 와서는 자기 방에 들어 앉아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대통령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자기가 취할 행동방침을 결정하려고 했어요. 3일 만에 원장군은 석방이냐 수용소 접수냐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되는데 접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다음 날 원 장군이 경무대로 들어가 계획서를 내놓고 결심을 밝혔더니 잘해봐 하면서 만 자 사인을 해주더래요. 이러한 사실들은 헌총사의 간부들도 몇 사람밖에 모르는 극비사항이었어요. 국방장관이나 육군 참모총장에게도 전혀 알려주지 않았어요. "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을 구상하면서 최초로 의논한 인물이 원용덕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당시 한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작전권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었지만 이승만은 이런 명령 계통과는 별도로 헌병 총사령부와 육군 특무대를 운용했다. 일종의 친위대였던 셈이다.
부산 정치파동에 앞서 이승만이 부산, 경남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도 육군 수뇌부는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래서 원용덕이 이끄는 헌총사가 계엄 업무를 비롯한 정치 탄압의 선봉에 선 적이 있다. 이승만으로서는 가장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군 수뇌부는 미국과의 연계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원용덕에게 알린 것이 처음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문종욱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 후 원 장군은 수용소 접수 작전명령을 만들어 봉투에 넣고 극비 스탬프를 찍어 봉한 다음 헌총사 과장급인 김진호, 황동준 중령 등 5명을 불러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 안 뜯어보겠다는 서약서까지 받고 각 반공포로 수용소 한국군 경비 헌병대장들에게 직접 전달시켰어요." 그러나 수용소 접수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미군 측에서 낌새를 알고 한국군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등 사전 예방 조치를 취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원용덕은 계획을 바꿔 반공포로 석방안을 들고 이승만을 찾아가 다시 만 자 사인을 받아왔다. 작전개시 명령만 남은 것이다.
이승만은 포로 석방과 관련된 제반 기술적 문제는 원용덕에게 일임하는 한편 반공포로 석방 작전을 외곽에서 지원하기 위해 마지막 단계에 가서 진헌식 내무장관, 갈홍기 공보처장, 최덕신 휴전회담 대표에게만 비밀리에 통고한다. 갈홍기와 최덕신에게 미리 귀띔을 한 이유는 사건 발생후 수습을 담당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헌식 내무장관의 경우 탈출한 포로들의 신변보호를 위해서는 경찰의 힘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진헌식의 증언이다. "5월 중순 각의 참석차 부산에서 상경, 경무대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이대통령이 나만 특별히 부르더니 하루 더 묵어가라고 합디다. 장관들이 다 나간 후 이 박사는 내가 반공 애국포로들을 석방해야겠는데 자네 의견은 어떤가라고 물읍디다. 내가 그것은 아주 어려운 국제문제이니 저로서는 어떻다고 답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고 대답했더니 이박사는 내게 방안이 하나 있는데 생각해 봐야 되겠어. 자네도 좀 이 문제를 잘 연구해 보게 하며 말을 끝맺더군요. "
그 후 6월초 어느날 6시께 경무대로 부터 급히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고 들어갔더니 최덕신 장군이 이미 와 있고 얼마후 원용덕 사령관이 들어왔습니다. 이대통령은 우리 세 사람에게 내가 애국포로들을 석방할텐데 이에 대한 방안을 연구들을 해서 오늘 밤 중에라도 들어와 보고해 주게라고 해요. "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갈홍기의 방에 들어가 대책을 세웠다. "원 장군은 우선 기밀보장을 위해 각 수용소의 국군 경비헌병대 간부들을 심복자들로 배치키로 했고 나는 탈출 포로들에 대한 보호대책에 만전을 기하기로 했어요. "
석방작전을 앞둔 이승만의 결의는 단호했다. 미군의 저지로 석방이 지연된 수용소 헌병대는 자결을 각오하라는 사전명령까지 내려두었다. 여기에다 원용덕의 치밀한 사전준비, 헌병들의 포로에 대한 동정심 등이 한데 어우러져 이승만 외교의 또 하나의 쾌거인 반공포로 석방은 비록 미군경비의 총격으로 60여명의 사망자를 내긴 했지만 대성공으로 끝났다. 이승만은 18일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한 것 임을 떳떳하게 밝히는 명문이었다.
"제네바 협정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시켰어야 할 터인데 유엔 당국들과 또 이 포로를 석방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우리의 설명을 들은 분들은 동정상으로나 원칙상으로나 동감을 가진 것으로 내가 믿는 바이다.
그러나 국제상 관련으로 해서 불공평하게도 이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했던 것이다. 지금와서는 유엔이 공산측과 협의한 조건이 국제적 관련을 더욱 복잡케해서 필경은 우리 원수에게 만족을 주고 우리 민족에게 오해를 주는 흠상을 일으킬 염려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흠상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포로를 오늘 6월18일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엔 사령관과 또 다른 관계당국들과 충분한 협의가 없이 이렇게 행한 이유는 설명치 않아도 다 알 것이다.
각 도지사와 경찰 관리들에게 지시해서 이 석방된 포로들을 아무쪼록 잘 지도 보호케 할 것이니 다 그 직책을 행할 것을 믿는 바이다. 우리 모든 민중이나 친구들이 다 협조해서 어디서든지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해줄 것을 믿는 바이다. " 이승만은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사 하루 전인 6월17일 아이젠하워에게 휴전 문제에 관한 종전의 입장 고수 방침을 알리면서도 미국의 원조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서한까지 보냈다.
당시 아이젠하워의 심정을 보자. "6월17일자로 나에게 보낸 이 대통령 서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폭탄이 터졌다. 2만5천명의 비공산포로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했으며 이 사건에 한국정부가 관계했음을 인정하였다. 이들 2만5천명의 포로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 포로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보급로나 후방지역 안전에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조치는 우리가 몇달 동안 북한과 중공에 대해 주장해온 입장의 바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
이승만의 이 조치가 국민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얼마나 높였는지에 대해 클라크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6월18일 오전 6시 나는 우리가 지금껏 두려워하고 있는 사실이 정말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에 후딱 잠에서 깼다. 이 대통령과 의견을 달리하고 결과를 우려하는 사람들 까지도 이 석방의 과감성에 대해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징조는 이 석방 조치로 이대통령의 국민적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
<이한우 기자>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1편. 구한말 감옥서 공화정 구상
2편. 수감생활
3편. 독립정신
4편. 출옥직후
5편. 첫번째 도미
6편. 밀사역 실패
7편. 워싱턴대 유학시절
8편. 하버드대 석사시절
9편. 프린스턴대 박사과정
10편. 박사학위논문 "외교는 힘. 국제법은 없다"
11편. 6년만의 귀국. YMCA 학감
12편. 두번째 미국행
별편: 이승만 대통령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13편. 하와이
14편. "나라 잃은 한국인에겐 민족교육 필요"
별편: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을 마치고 관계자 방담
15편. 3.1 운동 전후
16편. 3.1 운동 직후
17편. 상해잠입
18편. 임정통치 5개월
19편. 임정 대통령 마감
20편. 프란체스카와 결혼
21편. 암흑의 시절
22편. 일본 내막기 출간
23편. 미국의 소리 방송
24편. 친한그룹 형성
25편. OSS 계획 동참
26편. 일본 항복
27편. 라이벌
28편. 귀국 직전 국내 정국
29편. 귀국
30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31편. 신탁통치 반대
32편. 하지와의 관계
33편. 정치적 자산
34편. 도미 외교
35편.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36편. UN 한국위원단 내한
37편. 제헌의회 선거
38편. 초대 대통령 선거
39편. 초대 내각
40편. 반민특위
41편. 농지 개혁
42편. 민국당의 내각제 추진
43편. 김구 암살
44편. 48-50년 건국 기틀 잡기
45편. 50년 5.30 선거가 정권 위기였나
46편. 6.25 초기 행정
47편. 6.25 초기 행적
48편. 한국군 작전권 이양
49편. 38선 돌파 명령
50편. 거창 국민방위군 사건
51편. 부산 정치파동
52편. 자유당 창당
53편. 평화선 설정
54편. 휴전 반대
55편. 반공포로 석방
56편. 휴전 협정
57편. 족청계 제거
58편. 6.25 이후 외교노선
59편. 불교 정화 - 불교계의 친일타파
60편. 3선 개헌 - 사사오입 3선개헌
61편. 교육 대통령
62편. 전후 복구 구상
63편. 원자력 연구개발
64편. 4.19 학생대표 증언
65편. 거인이 지다
별편: 박정희 “건국 대통령 모셔라” 이승만 박사 환국 특명
별편: 이승만 대통령에 서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
[아! 우남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