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사망 1926년 2월 11일, 일찍죽었네
일본 제국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후대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11]
어렸을 당시에 총명했고 똑똑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애초에 민족을 팔아넘길 정도면 똑똑함을 넘어선 머리인 것이다
사실 이완용은 재산이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였고[62] ?????
한일 신협약 때 10만 원, 합병 때 15만 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은거 밖에 없음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이완용이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는데, 이는 병탄 이전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심지어 죽을 때 유언으로 사회 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을 총독부에 기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완용은 생전에도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나라를 팔아 먹은 악인치고는 평민에 대한 악행이 없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이기에 핍박하고 겁탈하거나 흔히 말하는 벼슬아치의 행보를 보이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려는 야망이 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의외로 관료로서의 이완용과 지식인으로서의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46] 실제로 이완용의 업무 스타일은 해당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대한제국에 대한 애국심만 투철했더라면 꺼져가는 조선의 명운을 되살릴 만한 유능한 인재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일단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세워진 거다. 1898년경,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이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사이에서조차 아싸 신세였다고 한다.???? 물론 생전 일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나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았던 것 때문에 사회성과 대인관계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인물
졸렬한 행보와는 달리,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짱 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 같은 진짜배기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양부에게는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양 이복형[24]인 의붓형 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문이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 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나 테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 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테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17]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18]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
그의 친일 행적과는 별개로 서예에 능해 구한말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처음에는 매국노로 욕하는데 .. 사실은, 의외로, 효자, 졸렬한 행보와는 달리, 객관적으로는,,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치고는...
나라 팔아먹은거 빼고는 다 좋음... 조조가 생각이 나네 , 난세에 간웅, 치세에는 능신 ,, 차라리 이완용이 고종대신 왕이었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