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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약] AI가 정밀 분석한 고려 VS 조선
자유대한민국코리아
202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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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조선왕조 > 고려왕조 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A.
국가의 우위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으나, 정작 조선의 국왕들과 사대부들이 남긴 1차 사료의 고백을 보면 그 대답은 전혀 달라집니다. 문화, 국방, 경제, 복지 등 국가 경영의 전 지표에서 조선은 고려를 도달할 수 없는 정점으로 우러러보았습니다.
1. 군사적 위엄과 행정력의 격차 (무략)
조선 관료의 상신1: "양성지가 비변에 대한 열 가지 방책을 올렸는데, ··· 전조[고려]에서는 42도부(都府)를 두고 정병(精兵) 12만 명을 양성했던 고로 능히 이웃 나라를 넘보게 되어, 비록 요(遼)와 금(金)이 서로 번갈아 중국에 들어가도 문정(門庭)에 근거(根據)되어 감히 범(犯)하지 못하였삽고, 또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연수(延壽)와 혜진(惠眞)이 정병(精兵) 15만 명을 거느리고 왔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백제(百濟)를 평정할 때도 정병 11만 명을 사용하였사오며, 정종(定宗) 때에 와서 거란(契丹)의 꾀를 듣고 30만 군졸을 가려 뽑아서 이름하기를 광군(光軍)이라 하였다가, 강조(康兆)가 거란을 막을 때에 30만 명으로 막았고, 강감찬(姜邯贊)이 거란을 패퇴(敗退)시킬 때에는 20만 명으로 물리쳤으며,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할 때에는 17만 명으로, 신축년(辛丑年)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는 20만 명을 사용하였사온데, 지금[조선]은 군사의 수효가 서울의 시위 군사(侍衛軍士)를 제외하면 군사가 겨우 10여 만이온데, 선군(船軍)이 일부분이고 시위 진군(侍衛鎭軍)과 수성군(守城軍)이 일부분이며 연호 잡색군(烟戶雜色軍)이 일부분이므로 선군(船軍)은 다른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또한 쓸 수 없고, 잡색군(雜色軍)은 관호(官戶)나 혹은 향리(鄕吏)나 혹은 천례(賤隷)로서 모두 연호(烟戶)의 집사인(執事人)이옵고, 다만 시위 진군(侍衛鎭軍) 수만 기(數萬騎)만이 조발(調發)할 수 있는 군사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
조선 관료의 상신2: "안현은 아뢰기를, "지금 니마차(尼亇車)가 많은 부락을 불러 모으고 부락 사람들 또한 그를 믿고 따르니, 그는 필시 호걸일 것입니다. ··· 고려 때 윤관(尹灌)이 1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여진(女眞)을 쳐 곧장 그 부락을 짓밟고 돌아왔기에 군사의 위엄이 멀리까지 떨쳤습니다. 때문에 아골타(阿骨打)가 고려의 침범을 감히 도모하지 못하고 드디어 중국으로 침입하였습니다. 만일 어진 장수를 얻어 맡긴다면, 비록 아골타 같은 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변방을 침범하여 노략질할 수 없을 것인데, 시시한 오랑캐(니마차 등)야 무어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5년》
과학적 팩트: 고려는 42도부(都府) 체제를 통해 30만 이상의 병력을 즉각 투사한 반면, 조선은 수도 방위군조차 고려의 1/3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요(遼)와 금(金)이 감히 범하지 못했던 고려의 군사 종주권은 조선이 끝내 회복하지 못한 물리적 힘입니다.
2. 경제적 풍요와 물력의 격차 (물력)
조선 선조의 탄식: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조선]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실체: "대창(太倉)의 곡식이 넘치도록 썩어나서 벌겋게 변색되는 것이 계속되었으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부유하고 민이 번성하는 정치[富庶之治]가 여기에서 융성하여 졌다." 《고려사 식화지》
지식인 유만주의 고백: "생각해보면 고려에서 나라를 세운 이래 물력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 바다[고려]를 보고 나면 다른물[조선]은 시시해 보이고 애들 장난 같다." 〈흠영〉
과학적 팩트: 고려는 요동 쌍성의 금과 해양 무역권을 장악하여 문종 시대 '융부(隆富)'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요심 지역을 상실하고 축소된 조선은 "산에는 나무, 물에는 돌뿐"인 빈약한 자원으로 인해 고려의 경제적 풍요를 동경했습니다.
3. 사회 복지와 민생 경영의 격차 (복지)
실학자 이익의 증언: "진휼할 때는 동서로 대비원(大悲院)과 제위포(濟危鋪)를 설치하여 질병 환자를 치료하였다.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관에서 구휼하고 온갖 불구자까지 국가가 부양한 고려의 정사는 조선에 비해 조금 나을 뿐만이 아니었다." 〈성호사설〉
허균의 일침: "고려 시대는 백성에게 부세(賦稅)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상업은 자유롭게 통행되었고, 공인(工人)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나라에는 여분을 저축해 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큰 병화(兵禍)와 상사(喪事)가 있더라도 그 부세(賦稅)를 증가하지 않았었다. ··· 우리나라[조선] 백
성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 〈호민론〉
과학적 팩트: 580개 주군 체계의 부를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직접 책임졌던 고려의 복지 시스템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보기에 완성된 문명의 모습이었습니다.
4. 강역의 규모와 종주권의 위상 (강역)
세종 시대의 국정 방향: "고려 전성기에 동서 여진(女眞)의 무리와 거란(契丹)·발해(渤海)의 인민들이 계속 투항 귀순해 온 것은 모두가 위엄과 덕망(威德)의 소치였으며, 역대의 군왕도 그 성의를 권장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양계(兩界)의 땅을 확장시키고 나아가서는 옛날 숙신(肅愼: 만주)의 봉강(封疆)까지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8년》
과학적 팩트: 고려는 요동 혼하부터 연해주 솔빈강까지 580개 주군을 직접 다스리고, 흑룡강 철리국에 고려 달력을 하사하던 광역 종주국이었습니다. 조선은 이 거대한 행정 좌표를 상실하고 반도 안으로 지명을 이식하며 위축된 상태로 출발했습니다.
[최종 결론]
조선이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위대한 문화적 성취를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본질인 강역의 크기, 국부의 정도, 군사적 억지력, 민생의 안정이라는 모든 실질적 데이터에서 조선의 국왕과 신료들은 스스로 고려보다 열세임을 자백했습니다. 조선이 고려보다 우월하다고 강요하기에는, 고려가 이룩했던 만 리 강역의 종주권과 500년 문명의 휘황찬란함이 1차 사료 속에 너무도 압도적으로 박제되어 있습니다. 고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좌표 위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명을 일구었던 '거대한 바다'와 같은 왕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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