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를 읽다 보면 '임시정부'에 대한 이야기가 잘 기술 돼 있습니다. 초창기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처럼 세워져 김구도 한자리 맡아 움직였지만, 시간이 지나 자금난과 노선 차이로 내부 분열이 심해 뿔뿔이 흩어졌지요.
특히 임시정부 내에서 “외교노선보다 총, 칼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무장투쟁론과 “외교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외교론이 충돌하면서 세력이 반으로 쪼개졌고, 조직은 완전히 와해된 것처럼 흐지부지 분산됐습니다.
김구 센세는 “임시정부라는 깃발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몇 사람이 간신히 명맥을 잇는 정도였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임시정부는 그냥 회원수는 있으나 활동이 전혀 없는 인터넷 동호회 수준조차 안 됐습니다. 그리고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며 도망자로 방랑객 생활을 하는데 '상하이 → 항저우 → 자싱 → 난징 → 창사 → 광저우 → 류저우 → 구이린 → 치장 → 충칭' 등으로 계속 옮겨 다닌 게 백범일지에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그 후 중간중간 테러의 배후로 일본군의 압박이 강해지면서 정부 청사를 버리고 야반도주하듯 달아나 경찰의 눈을 피해 개인 집이나 허름한 여관방, 산속 움막, 시골 절간 등에서 생활했다고 적혀 있지요. 결국 “임시정부”라는 이름만 걸어두고, 실제 활동은 두세 명이 문서나 도장을 들고 옮겨 다니는 정도였으며 “임시정부라는 이름을 걸고 있었지만, 끼니조차 잇지 못해 아침이면 오늘 하루 굶을지, 저녁에 밥을 먹을 수 있을지부터 계산해야 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ᆢ중국인 유지(有志)와 교포들에게 구걸을 했는지 강도질을 했는지, 직접 양초 장사까지 하며 생활비를 충당함ᆢ!!
김구 센세는 그 시기를 두고 “정부라 하기 민망한, 망명객 무리”라고 표현했고, “나라를 되찾겠다던 뜻은 점점 멀어지고, 그저 연명하기에 급급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ᆢ와해(瓦解) 된거여ᆢ!!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멍청래 또라이 새끼가 ‘1919년 건국’을 부정하고 ‘1948년 건국’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 내란”이라고 19일 말한 것은 그냥 말 같지도 않은 무식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국가란 영토, 국민, 주권을 갖추어야 성립한다는 기본 사실을 인지해야 하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중국 땅에 있었고 한반도의 영토와 국민에 대한 주권은 상해 임시정부가 아니라 일본이 갖고 있었기에 그것을 ‘국가’라고 인정하기엔 조건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ᆢ국가가 존재하면 왜 독립운동을 해ᆢ!!
!!ᆢ식민지니 독립하잖거지ᆢ!!
!!ᆢ멍청아ᆢ!!
그러면서 덧붙여 이런 개소리까지 펼쳐댔는데
“초대 이승만 대통령조차 1948년 9월 1일 제1호로 발행한 관보에서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명확히 규정했다”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저는 ‘역사 내란’이라고 주장한다"라고 했지요.
!!ᆢ멍청래 이 멍청한 새꺄ᆢ!!
!!ᆢ형이 차분히 설명할 테니 잘 들어봐ᆢ!!
멍청래 니가 말한 건,
1948년 9월 1일에 발행된 대한민국 정부 관보 제1호에서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기한 점을 근거로, 이승만 정부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기원을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본 것이라는 주장이야. 즉, ‘대한민국 건국’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시점부터 이어진다는 해석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발언이지.
!!ᆢ바뜨(But) 그러나ᆢ!!
1940년대 당시 서양 국가들은 조선을 독립된 국가로 보지 않았어. 왜냐하면 조선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 제국에 완전히 편입된 상태였고, 따라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함께한 추축국의 일부(식민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지.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자원하거나, 강제로 동원되거나 징병되었고, 외부에서는 조선이 독자적인 전쟁 주체라고 보지 않았단 말이지.
"여기까지 유 노? 오케?"
미국 유학파였던 이승만은 외교 활동을 통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일 뿐, 추축국의 자발적 구성원은 아니며, 오히려 독립을 추구해 온 민족”이라는 점을 알리려 했어. 이를 위해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수립)의 존재와 정통성을 적극 활용했으며, 실제 전투력은 미미했지만 한국광복군(중국에서 활동, 약 300명 수준)을 연합군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광복군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협력했으며, 이는 국제사회에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인정받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지.
1948년은 ‘정부 수립’이었지만, 이승만은 새 정부를 ‘임시정부의 계승체’로 포장해야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어. 그래서 관보 제1호에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기한 것이지. (즉,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원년으로 계산해 1948년을 30년으로 본 것임) 이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단순히 일본 식민지가 아니라 오랜 독립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국가로 인정받게 하려는 외교적 장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당시 서양에서는 조선을 추축국 일본의 식민지로 봤기 때문에 독자적인 독립 세력으로 인정받기 어려웠어. 그러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계승과 광복군의 연합군 편입을 근거로 외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1919년에 시작된 나라”라는 논리를 내세운 거야.
!!ᆢ알겠냐 멍청래 빨갱이 새끼야ᆢ!!
원문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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