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은 너무나 포괄적인 의미로 쓰여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주 가까운 친구가 아니더라도 '우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고등학교 동창이나 대학 동창들과의 관계에서도 '우정'이라는 말이 쓰이는 게 좋은 예이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사이라 할지라도 동창회 자리에서는 우정을 위장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또한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각자 어느 정도 사회적 성취감을 느끼는 상황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공허한 관계로 시종하기 쉽다.
학교 동창생의 경우, 재학 시절엔 무척 친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은 잘되고 한 사람은 못됐을 때 우정을 지속시키기는 어렵다.
친구 사이에도 질투심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피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의 우정은 대개 다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진짜로 의기투합하여 뜻과 행동을 같이하는 친구 사이의 우정이요,
둘째는 단지 사교상의 목적으로 만나면서(이를테면 '술친구'따위) 이루어지는 우정이다.
그리고 셋째는 사업이나 직업 관계로 만나면서 생기는 우정인데, 직장 동료 사이나 문단의 교우(交友) 등이 여기에 속한다.
위의 세 가지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우정은 우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종류의 우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아간다. 먹고 살기 위해서도 그렇고, 심심하고 권태로워서도 그렇다. 하지만 언제나 뒷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첫번째 진짜 우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참된 우정은 없다. 설사 그런 우정이 있다고 해도 우정이 애정보다 더 은근히 오래가는 기쁨을 선사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정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더 귀찮게 한다.
정신적인 것은 언제나 맺고 끓는 것 없이 우리를 결박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애정보다 우정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애인 여자와 만나기로 했을 때, 남자 친구에게서 연락이 오면 먼저 약속을 취소하고 친구를 만날 정도였다.
그런 친구 중의 하나가 지금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있는 X이다.
내 결혼식 사회를 맡아줬을 정도로 그는 나와 절친했던 연대 국문과 1 년 후배였다. 그는 대학원 진학이 늦어, 그가 대학 강의를 시작할 때도 교수가 될 때도 나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던 그가 태도를 돌변하여 2000 년에 나를 연세대 국문과 교수 직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마침 그가 학과장 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면서 하는 봉사직인 학과장 보직을 이용해 몇몇 학과 교수들(그들도 나와 친했던 동료, 후배들이다)을 규합하여 나를 재임명 탈락시켜야 한다는 국문과 인사위원회(나도 몰랐던 조직이다)의 결의서를 학교 본부에 제출했다.
내가 업적이 많고 학생들도 거세게 반발하여 학교 측은 결정을 보류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배신감에 의한 외상성(外傷性) 우울증으로 인해 3년 반이나 휴직하고 정신과 병원에 입원도 해가며 자살기도까지 할 정도로 고생하였다.
나는 지금도 X가 무섭다 (미운 것보다도). X 등 모든 친구 교수들의 나에 대한 분노의 원인은 오로지 하나,
즉 막연한 <질투>였던 것 같다. 우정은 정말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