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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난징대학살 날조 총정리
rosi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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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은 날조였다
난징의 일본군이 행한 많은 인도적활동, 일본군에 의한 범죄는 소수 있었지만, 일본군에 의한 [대학살]은 없었다. 비인도행위를 행한 건 오히려 중국병사들이었다.
「난징대학살」이란?
1937년 12월, 일본군은 지나사변을 종결하기 위해서, 난징에 침공. 12월 13일에 그곳을 점령했다.
대체적으로 알려져있는 [난징대학살]은, 그 점령으로부터 6주정도의 기간에 수십만명단위의 인간(시민이나 포로)이 일본군에 의해 난징에서 학살되었다는 설입니다.
중국공산당이 공식적으로 기술한 것에서 그 수는 30만명, 중국에 있는 남진대학살기념관의 외벽에는 큰 글자로 [300000]이라는 숫자가, 희생자로써 알려져 있고, 중국인들은 반일감정을 심기 위해서 매년 그곳에 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난징대학살은 일본에도 전후, 공산당원이나 공산주의들을 중심으로 알려져오기 시작해서,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을 끌여들어, 교과서에까지 기술하게 되고, 일본인의 [자학사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30만명이나 되는 대학살,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의 학살, 또는 작은 규모의 학살조차도 실제로는 없었다
라는 것이 많은 증거를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중국 병사들의 악행에 시달린 난징 시민들은, 일본군의 입성을 환호의 목소리로 맞이하였습니다. 이건 일본군의 입성식의 날(1937년12월 17일)에, 식량과 담배의 배급을 박고 환호로 맞이하는 난징 시민들, 시민이 달고 있는 일장기의 완장은 민간인으로 변장한 중국 병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본군이 난징 시민 모두에게 배부한 것이였다. (毎日版支那事変画報 1938.1.11発行)
일본병사들에 의한 어느정도의 범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느 나라의 군대에서도 발생하는 정도이며, 오히려 난징에서의 일본군의 활동을 보면, 매우 인도적인 것들이 많이 눈에 들어옵니다.
난징 전투가 한창일 때, 난징 시내에 있던 민간인은 모두, 난징 시대에 설치된 [안전구획]에 모여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그곳을 공격하지 않았기에, 안전구획의 민간인들은 그 누구도 죽지 않았습니다.
남징 시민에게 식량 등을 나누어 주는 일본 병사들(영국계신문「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1937.12.24付 남징 점령 11일후)
일본군에 의한 난징 점령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 대다수의 중국군들은 군복을 벗어버리고, 중국인 시민을 죽이고 옷을 뺏어서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난징의 안전구획에 도망쳐 들어왔습니다.
안전구획에 도망쳐 들어온 중국병사들 중에는, 무기를 몰래 가지고 시가전을 준비하는자, 또는 안전구획안에서 강간이나, 약탈, 살인등을 저지르고, 그것을 일본군이 한 짓으로 보이게 하거나, 피해자를 협박해서 [일본병사가 범인]이라고 말하게 하는 반일공작을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그들을 찾아내자, 그들중에 특히나 반항적이었던 불법전투원을 처형했습니다. 국제법에서는, 이런 불법전투원들은 [포로]로써의 대우를 받을 수가 없고, 처형되어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법전투원의 처형이, 잘못 전달되어 [포로의 학살]로 전해진 면도 있습니다.
남징 시민과 즐겁게 대화하는 일본병사들(1937.12.20촬영 난징 점령 7일후 支那事変写真全集1938年刊)
그러나 일본군은, 한편으로, 시민이나 포로에 대해 많은 인도적 원조활동을 시행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군 점령하에 굶어서 아사하는 난징시민은 한명도 없었지요. 또한 일본군의 활동에 감격해서, 왕징웨이의 친일정부군에 들어온 중국인 포로도 많이 있었습니다.
난징에 대해 비인도적행위를 행한 것은, 오히려 중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군복을 버리고 민간인 속에 섞여 들어온 중국병사들은 알몸일 수는 없었기에, 민간인의 옷을 빼았기 위해 민간인을 죽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에스피라고 불리는 미국 부영사관 외에도 여러사람들도 목격했지요. 학살을 행한것은 일본군이 아닌, 중국병사들이었습니다.
일본군에 의한 난징점령5일째의 아사히 신문
(右)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중국인으로부터 물건을 사는 일본병사
(中上)난징에 돌아와서 맡을 갈고 있는 농민。
(中下)평화가 되어, 난징으로 돌아온 중국인들.
(左)중화가(中華街)가 명물, 가두상집, 어린이도 어른도 일장기 완장을 차고 웃고있다
(朝日新聞 1937.12.18付)
이 아래는 그 상세한 상황입니다.
난징에 돌아온 주민
난징시의 인구는, 일본군의 난징 공격 개시전에는 약 20만명이었습니다. 20만명밖에 없는 곳에서, 어떻게 30만명을 죽였을까요?
게다가 일본군의 남징 점령 후에, 난징 시민의 대다수는 평화가 회복된 난징에 돌아와서, 1개월 후에는 인구가 25만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만약 [학살]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과연 돌아올까요?
일본군의 난징에 대한 공격 개시 약 1주일 전의 1937년11월28일에, 경찰청장관王固磐은、난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대해, [난징은 지금 20만명이 살고 있다]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뒤에 곧 12월 13일에 난징을 점령 했습니다.
이후에 5일 후, 12월 18일에는, 난징국제위원회(난징의 주민이 모였던 안전구획을 관할하는 위원회)가 인구[20만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또 12월21일에는, 난징 외국인회가 [난징의 20만시민]을 언급, 거기에 난징 함락으로부터 1개월 후의 1월14일에는 국제위원회가 인구[25만명]으로 늘어났다고 공표를 했지요.
난징 점령 8일째의 아사히 신문 타이틀은、
「어제의 적에게 온정《난징 성내의 친선풍경》」
(右上) 치료를 받고있는 중국 부상병
(左上)일본군 장병의 정으로 식욕을 채우는 투항병
(한가운데)중국인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일본 병사들
(右下)야마다 부대장과 이야기하는 적의 교도총대 참모, 沈博施소좌
(左下)난징 성내에 쉬는 중국인 시민들
(朝日新聞1937.12.21付)
주민이 돌아왔습니다. 上智대학의渡部昇一교수에 의하면 , 난징 함락으로부터 1개월 후에 일본군이 약 [25만명]의 주민에게 식량을 배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점령후, 일본군은, 민간인으로 변장한 중국병사와 진짜 민간인을 구별하기 위해, 한명 한명 면접을 한 후에, 민간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에게 [양민증]을 발행했습니다.(1937년12월부터1938년1월)。
60세 이상의 노인과 10세 이하의 아이들은 병사 일리가 없을 거라 보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민증을 발행하여, 그 발행수는 16만명에 달했습니다.
난징 국제위원회의 멤버로써 난징에 있었던 루이스・스마이스 교수는, 난징의 일본대사관의 외교관補・福田篤泰씨에 보낸 편지에는、「이 수에 따르면 난징의 인구는 25만~27만명정도이겠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난징 점령후, 난징의 인구는 늘었다는 것이죠
남징의 병원의 중국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본병(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 1937.12.18付 난징 점령 5일후)
난징 입성 때, 신문기사들도 동행
난징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 되었을 때, 일본군 병사들과 같이, 많은 신문기자나 카메라 맨들이 같이 난징 시내에 들어왔습니다. 그 총수는 100명이상, 또한 일본인기자 뿐만 아니라, 로이터나 AP와 같은 유럽과 미국기자들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중 그누구 한명도 [30만명 대학살]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본의 위생병
점령7일후 1937.12.20林特派員撮影 朝日版支那事変画報1938.1.27刊)
미국의 파라마운트・뉴스에서도, 난징 점령의 기록영화를 만들었었지만, 그 중에 [30만명 대학살]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당초 중국에서[노스차이나데이리뉴스]라는 영국계 영어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는데, 1937년12월24일(난징 함락의 11일후)면을 보면, 일본군이 난징 시민에 식량을 배부해서 시민들이 기뻐하는 광경이, 사진이 들어간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게 [대학살]이 있었다는 도시의 광경일까요?
또 난징에서 실제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일본의 당시의 신문을 관람해보아도, 잘 알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병사가 무기도 휴대하지 않고 난징 시민으로부터 물건을 사는 모습, 난징 시민과 환담하는 광경, 일장기가 그려진 완장을 달고 웃음을 짓는 난징 시민의 모습 등이, 사진과 같이 해설되었지요. 또한, 평화회복을 알고 난징에 돌아오는 주민, 중국의 부상병을 돌보는 일본의 위생병들, 다시 농지를 갈기 시작한 농민들, 그외에도 많은 사진이 기사와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
「중국인은 일본인 카메라맨이 오면, 적극적으로 어린이를 안으면 촬영에 협조해주고 있다. 일본병사나 일본인을 두려워하고있지 않았다」
(카메라맨佐藤振寿씨。넘굥좀룡2알휴 1937.12.15撮影 南京安全区にて)
이건 평화가 돌아오고, 다시 이전의 생활을 되찾은 난징 시민과, 일본병사들과의 마음과 마음의 교류의 모습입니다. 당초, 보도는 [검열]하에 있었다고 해도, 이것들은 도저히 [대학살]이 있었던 도시의 광경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일장기의 완장을 달고, 길가에서 야채를 파는 난징 시민
(1937.12.15 난징 점령 2일후)
장제스는 한 번도 「난징대학살」에 언급하지 않음
중국국민당의 총통인 장개석은 우너래부터 난징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이 쳐들어온다는 걸 알자마자, 난징의 방위는 부하에게 맡기고, 난징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 뒤에 전투가 끝날때까지, 장제스는 중국인민들을 향해 몇백번이나 라디오 연설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그는 단 한번도 [난징대학살이 있었다]라는 것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대학살이 있었다면, 그건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장제스의 인식에서도 [난징대학살]은 없었다는 것이죠
난징 함락 직후, 난징 근교에서 중국인의 어린이와 손을 잡고 걷는 赤星昂(아카보시 타카시)소위(夫人提供)
일본군에게 의해 죽임을
당한 민간인은 약간에 불과했다.
일본군의 사령관松井石根(미츠이 이와네)대장은 난징 공략전에 [결코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라고 전군에 엄하게 명을 내렸습니다.
안전구획에서 난징 시민에게 식량과 과자를 배부하는 일본병사(난징 점령5일후 1937.12.18付 東京日日新聞より)
그리고, 난징 공략전이 한창일 때, 난징에 있었던 시민들은 모두, 난징 성벽내에 특별히 설정된 안전구획 속으로 피난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그 안전구획에도 중국병사가 많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안전구획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마구 쏘여진 총알에 맞아 몇명 정도 사상자는 발생했지만, 그런 사고들은 제외한다면, 안전구획에 있는 사람은 모두 무사했습니다.
실제로 난징 점령 후, 안전구획의 리더였던 독일인、존 라베는 [일본군이 안전구획을 공격하지 않은 것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는 감사장을 미츠이 이와네 대장에게 직접 전해주었습니다.
또한 공략 종료후에, 일본군의 감독・지휘아래에, 「紅卍会」라는 난징의 중국인 단체가, 죽은 중국병사들의 매장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은 매장한 사람들의 명부를 남기고 있었는데, 그 중에 여성이나 아이의 시체는 거의 포함되 있지 않았씁니다. 이건 민간인의 희생자가 적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난징 안전구획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해서, 난징 공략전투 전부터, 난징에 살고있던 유럽이나 미국인들은 [난징 국제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에 의한 난징 점령후에 난징 에서 일어난 범죄사건을 정리하여, 피해신고서로써 일본군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이건, 난징에 보거나 들은 일본군에 의한 범죄(강간, 약탈, 살인)등을 기록한 것으로, 일본군의 단속을 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피해신고에는, 일본군에 의해서라고 보이는 범죄가 425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전문에 불과하고, 사료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것 전부가 사실이라고 가정을 해도, 그 중에 살인사건을 겨우 49건에 불과합니다.
즉, 어떻게 보아도 [대학살]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뿐만아니라, 그 49건중에서, 국제위원회의 위원이 직접목격한 것은 겨우 2건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전문이지요. 또, 그 2건중에 1건은, 존 마기 목사가 목격한 것인데, 일본병이, 군복을 버리고 민간인으로 변장한 중국병사를 찾고 있는 도중, 수상한 자를 발견해서 신분을 물었을 때, 급히 도망쳤기 때문에 죽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제법상, 합법적인 것이지요.
다른 1건도,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국제위원회의 위원은 누구도 난징에 있어서 위법한 살인을 목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학살도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역병방지를 위해 난징 시민에게 예방조치를 하는 일본병사
또 난징이 함락했을 때, 많은 중국 병사는 군복을 벗어버리고, 민간인으로 보이게 하고 안전구획안으로 도망쳐 들어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군은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토벌작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병사는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이마 위쪽에 햇빛에 탄 흔적이 없고, 모자의 흔적으로 병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 병사는, 손을 보면, 계속되는 총의 발사로 굳은살이 생겨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난징 시내에 가족이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일본군은 병사와 시민을 구별하여, 병사를 발견하면 체포하였습니다.
그 때, 오인체포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인체포가 있었다고 해도 그 수는 적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난징 공략전의 한창일때, 그리고 이 이후에 걸쳐서, 일본군에게 죽인 민간인의 수는, 소수밖에 없었지요.
그 외의 전문은 이곳으로
(자료의 양이 방대하니 열람에 주의)
난징 학살의 날조를 나타내는 자료
https://www.ilbe.com/view/11317693091
원문 출처:
http://www2.biglobe.ne.jp/remnant/nankingmj.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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