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석 앉아… 기대지도 않고 '꼿꼿' 조선일보 2009. 11. 02.
문둥병 환자와 함께...
퍼스트레이디 시절인 74년 12월, 고육영수 여사의 유품인 검은 코트 입고 강원도 오지의 한센병 환자촌 방문 모습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다시 정국의 핵(核)으로 떠올랐다. 정치권은 그의 입과 동선(動線)을 주목하지만 정작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를 가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숨은 권력'이라고도 불리는 박 전 대표가 10월 31일 모처럼만에 공개 행사에 나서 동행 취재했다.
오전 10시, 김포에서 김해로 향하는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는 박 전 대표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자리는 이코노미 클래스 첫 번째 줄 창가석. 50여분 비행 동안 그의 자세는 꼿꼿했다.
머리를 의자에 기대는 법도 없었다. 그는 해외출장 등 장거리 여행에서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전 11시, 비행기가 김해공항에 도착했지만 박 전 대표는 바로 내릴 수 없었다. 앞에 탄 비즈니스석 고객들이 내릴 때까지 뒤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박 전 대표의 첫 번째 부산 방문지는 해운정사. 그는 이 사찰 큰 방에서 동행한 국회의원과 사찰 관계자 등 20여명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조실(祖室·사찰의 최고 어른) 진제 스님과 박 전 대표만 독상(獨床)을 받았다.
이어 참석한 대규모 불교행사 '백고좌 대법회'에서 박 전 대표는 인사말이나 축사를 따로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맨 앞줄에 앉아서 2시간 넘게 진행된 법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다. 정치인들은 행사장에서 인사말만 하고 빠져나가는 게 보통이다. 박 전 대표 옆에 앉았던 현기환 의원은 "불교행사에서는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게 예의이고, 박 전 대표는 예의를 항상 중시한다"고 했다.
스님들이 완전히 퇴장하자 박 전 대표도 행사장을 떠났다. 100여명의 중년 남녀들이 아이돌 스타를 본 10대들처럼 박 전 대표에게 몰려들었다. 악수를 청하고, 그게 어려우면 몸에 손이라도 대보려 했다. 박 전 대표가 빠져나간 뒤 한 50대 여성이 "손도 못 잡아 봤데이"라며 속상해하자, 옆에 있던 여성이 "그래도 얼굴은 제대로 봤다 아이가"라고 했다.
밤 9시쯤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한 기자가 박 전 대표에게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라고 묻자, 박 전 대표는 웃으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안 돼요"라고 했다. 이런 그의 차갑게 느껴질 만큼 똑 부러진 반응을 주변 사람들은 '얼음 침(針)을 쏜다'고 표현한다. '그래도 하루종일 따라다녔는데, 설마…'라는 생각으로 질문을 던져봤지만 역시 그는 웃기만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부산=신은진 기자 momof@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