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기자 아손이 상인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조선에 들어와서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의 생활을
관찰하며 기록한 일기다. 한국 역사학자들이 왜곡하거나 상상을 하며 묘사한 과거와 달리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관찰한 조선의 생활과 모습을 실감나게 기록했다
1부 2부를 참고하는게 도움이 될것이다.
1부
http://www.ilbe.com/10808706066
2부
http://www.ilbe.com/10812054004
3부
코레아의 떡장수
시장 한구석에는 자그마한 난로 주위에 몇사람이 둘러 앉아 떡을 찌고 밤을 굽고 있었다. 농부나 구걸로 몇푼 모은 아이들이 주 고객이었다.
떡은 양념이 되서 매웠으며 무척 질겨 입안에 달라붙어 떨어질줄 몰랐다. 간혹 떡장수들이 한눈팔면 견공들이 달려들어 떡을 물고 달아났다.
그러면 그때마다 대소동이 일어나곤했다. 떡장수들은 소리지르며 야단법석을 떨며 귀머거리의 혼까지 빼놓을 정도로 소란을 피웠다.
서울의 거지들
서울에서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거지 아이들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이들은 다 떨어진 옷에다 천조각을 덕지덕지 기워 몸에 두르고 있어서
마치 하나의 넝마자루 같았다. 이들은 하루종일 거리를 헤매면서 동냥을한다.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며,
얼굴에는 해묵은 때가 끼어 더럽기 짝이 없다.
(조선시대 거지 사진을 찾을수가 없어서 그 당시보다 약간 깔끔한 1946 서울 거지)
귓바퀴속에는 진흙이 가득하고, 콧구멍에서는 두 줄기의 콧물이 흘러내리며, 헝클어진 머리털은 마치 칙칙하고
보기 흉한 끈적끈적한 말갈기처럼 머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 거지 아이들은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내며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거리 저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임자를 만났다 싶으면 한줌의 동냥을 얻어내기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는데 목적이 달성되면
그들의 흐느낌은 갑자기 즐거운 비명으로 돌변했다.
그들은 한푼이라도 더 차지할 욕심으로 동전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들의 몸은 서로 엉켜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었다.
그들은 숨을 쌕쌕거리며 서로 머리카락를 잡아당기며 승냥이처럼 물고 할퀴며 녹초가 되어
아무도 싸울 마음이 없게되자 서로 합의를 보고 동전들을 똑같이 나눈 다음 다시 먹이를 찾아 사냥길에 나섰다.
이 거지들은 다리 밑에서 쓰레기와 함께 잠을 잔다.
주인 잃은 개처럼 이 쓰레기 더미에서 저 쓰레기 더미로 먹을 만한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다니며 떼를 지어 견공들과 함께 먹이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달구지 싸움
골목들은 서로 비슷하여 분간할수 없었다. 사방이 담과 하수도였고, 곳곳에 개와 지게꾼이 있었으며, 연기와 악취뿐이었다.
어떤곳은 좁기가 이루 다 말할수 없어 달구지를 만나거나 가마가 지나칠때면 몸을 담에 찰싹 붙여야만 했다.
한번은 한 무리의 소달구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도 소달구지가 내 꽁무니를 따르고 있었다. 두 무리들이 서로 지나칠수 있는 틈이 없었다.
달구지 주인들은 오랫동안 누가 양보할것인지에 대해 말다툼을 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고
이제는 아주 땅바닥에 주저앉아 담뱃대를 꺼내물고 느긋이 협상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시간이 한동안 지체되었고 골목길이 트이고 다시 통행이 풀린 것은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콜레라와 유행병
물통을 나르는 사람들은 양쪽에 물통이 매달려있다. 식수는 근처의 우물에서 가정으로 운반이 되는데
이 우물들은 위생적인 면에서 볼 때 최상급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여인네들은 우물 바로 주위에서 빨래를 하고 채소나 생선도 다듬었다.
이때 나온 찌꺼기들이 다시 우물로 흘러 내려가 우물물을 더럽혔다.
식수에 대한 부주의와 무관심이 바로 서울에 그렇게 자주 만연되는 콜레라와 기타 유행병의 원인이라 한다
한의학의 미개함
독일인 분쉬 박사는 진찰실과 수술실을 차려 코레아인들을 상대로 의료사업을 하고 있었따.
처음 2년동안에는 겨우 43명의 환자가 그의 의술을 믿고 찾아왔다. 대부분 피부병에 시달렸는데 이 독일인 의사를 믿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마지못해 그의 처방약을 보용하였다. 병이 조금이라도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면
약복용을 중단하고 진찰 받으러 오지 않았다.
“이 불쌍한 사람들이 받는 괴로움이 어떠한것인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의 무지와 미신은 끝이 없습니다. 무당이나 도술사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지요.
이들은 돌팔이 의사들보다 더 형편없는 의술(한의학)을 가지고 있고
이들이 처방하는 약들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것들이라 말로 표현할수 없습니다”.
분쉬 박사는 내게 그책 <의사들을 위한 지침>을 건네주었고 나는 영국인 선교사가 번역한 그책에 몰두하였다.
가장 괴이한 치료법으로는 쇠똥을 바른다는가, 해바라기 씨를 달여먹는다든가 하는것들이었다
. 어떤병은 환자가 복숭아 씨를 이등분하여 한쪽에는 ‘해’라는 달을 쓰고 다른 한쪽에는 ‘달’이라고 써서
꿀을 발라 다시 붙여 단숨에 삼키면 바로 낫는다고 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치료법으로 작은 개구리 세마리를 산채로 삼키면 모든 종류의 복통에 즉효가 있다는 처방이다.
만약 병세가 극도로 심할 때 삶은 까치 한마리나 네개의 구운 개발을 먹으면 좋다했다.
일반적으로 기운이 없는 애들은 마흔살된 여자의 머리카락을 넣고 충분히 끓인 뜨거운 물을 마셔야 된다고 했다.
책에 의하면 코레아에 만연되어있는 매독 또한 간단하게 치료할수 있다.
세마리의 메뚜기를 잡아 그 날개에 꿀을 바른다음 말려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3등분한후 술에 섞어 매일 아침 공복에 복용한다.
(일베인들은 이러한 미개한 의술을 너무나 많이 읽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낸다)
이런 것이 소위 코레아의 의술이었다. 1천 년전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코레아인들은 자기 나라의 의술을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분쉬 박사가 말했다.
“자주 있는 일로 코레아인들은 내 처방을 따르는 동시에 자신들의 어처구니 없는 치료법을 실시합니다.
만약 병이 나으면 내 처방이 효험을 본것이라고 절대 믿지 않고 한방의 치료법에 그 명예를 돌립니다.”.
젖가슴을 드러낸 코레아 여자
밖에 나와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드러내놓고 있었다.
극동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코레아 의 여성들은 바깥 세계와 격리된채 살아간다. 즉 차단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차단의 심도는 여성의 가정이 사회 어느 게층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귀족층 여성들은 그 차단이 절대적이고 중산층도 엄격하게 지켜지지만 귀족층보다는 부드러운 편이며,
비천한 여성들은 차단의 구속을 전혀 받지 않는다.
터케의 할렘이라 할지라도 코레아의 여성이 기거하는 안채보다 더 완전하게 보호되어 있다고는 할수 없을것이다.
만약 코레아의 (양반)부인이 여자 친구를 찾아가려면 남편에게 방문장소 시간 목적 을 상세하기 알려야한다.
이 모든 절차를 밟은후 완전하게 가릴수있는 가마에 올라 방문길에 나선다.
체통이 있는 집의 아녀자라면 절대로 걷는법이 없다. 가마는 부귀의 상징인 것이다.
(인터넷에서 조선 여자가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특정 한국인들의 근거없는 주장과
실제 스웨덴 기자가 100년전 직접보고 체험한 증언과 매우 다르다)
(아손이 직접 찍은 젖가슴 들어낸 여자)
(실제 책을 읽으면 기자 아손이 직접 찍은 수많은 조선의 사진이 나온다.
이 젖가슴을 들어내는 사진은 아손이 직접 찍은 사진이고 아손의 책에 수록 되어있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면 정확한 출처도 없이 일본이 역사 왜곡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가슴을 드러내면서 일본인이 찍었다고 한다.
가슴이 들어난 여자는 조선시대 존재하지도 않고 일본이 모두 의도적으로 조작한 사진이라는 주장을 하며 역사왜곡이 심하다.)
코레아 눈병과 무당
나라 전역에 만연된 트라코마 (눈의 결막질환)의 영향으로 장님이 엄청나게 많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직업은 무당이다.
이 무당만큼 수입이 좋은 직업도 드물기 때문이다.
이들 무당의 할일은 병자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악귀를 몰아내는 일인데 병이 심하지 않는 경우 무당은 성공한다.
재수만 좋으면 병세가 심하지 않는 환자받으면 그 무당은 나라 방방곡곡 유명하게 된다.
환자의 병세가 심하고 심상치 않다고 여겨지면 무당은 적당한 기회에 그럴듯한 트집을 잡아 책임을 전가시킴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살린다.
코레아의 풍수지리꾼
풍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거주하는 지방의 풍수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남자들이다.
이 직업이라는 게 타인의 무지와 미신을 밑천으로 삼는 고리대금 업자와 그 유형이 흡사하다.
왜냐하면 코레아인들은 그들의 선조를 명당에 모시지 않을 경우 온갖 불행이 자신들을 덮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손님이 풍수쟁이를 찾아와서 작고한 자신의 친척을 위해 명당을 하나 찾아 달라고 요청하면
그 풍수쟁이는 일단 손님의 집으로 가서 음식을 대접받는다. 그러면서 손님의 생활 정도를 눈여겨본 뒤에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장사 지낼 장사가 대충 물색되고 다음 작업으로 주위 지세를 조사한다. 어떤 산 하나가 홀로 우뚝 서서 주위의 지세를
내려다보는 꼴을 하고 있으면 작고한 사람의 자손이 도적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풍수쟁이는 자신의 방위표를 참조하여 무덤의 위치를 결정한다.
이 모든 것이 충분히 탐사된 뒤에야 비로소 무덤을 파고 풍수쟁이는 자신의 보수를 받게 된다
(아손은 독일 영사집에 머물면서 독일 영사와 아주 친해진다. 마침 황태자비가 죽어서 독일 영사가 초청받았는데
아손이 자기도 가고 싶다고 요청해서 독일 영사는 아손의 신분을 스웨덴 장군으로 변장시키고 아손의 초대장도 고종으로부터 받게 된다.)
(황태자비가 죽은 이야기도 있지만 일베에도 이미 많이 본 이야기라서 생략한다)
(황태자비 장례식때 찍힌 사진 . 아손도 이 사진과 비슷한 사진을 찍음. 실제 아손이 고종과 순종을 봤을때 인상)
고종과 태자
장례 행렬을 전송하고 나서 외교 사절단은 황제폐하와 배알하였다. 외교 사절단이 조의를 표하는 동안 나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볼수가 있었다. 황제의 얼굴은 개성이 없었으나 원만해 보였고 체구는 작은편이었다. 조그만 눈은 상냥스러워 보였고 약간 사팔뜨기였다. 그의 시선은 한곳으로 고정되지 못하고 노상 허공을 헤매었다.
성긴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렀지만 노란색 옷차림에 서양의 나이트캡과 비슷한 높은 모자를 쓴 모습이 마치 상냥한 늙은 목욕탕 아주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다. 외교관들이 조의를 표할때마다 황제는 엉거 주춤하게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굽히곤 했는데, 내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황제에 대한 이미지와는 사뭇 동떨어진것이었다. 이 한 많은 황제에게 나는 일종의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황제의 옆에 서있는 태자는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아주 못생긴 얼굴이었다.
작고 뚱뚱한 체격에다가 얼굴은 희멀겋고 부은듯해서 생기가 없어 보였다. 입술은 두꺼워 육감적이었고, 코는 납작했으며 , 넓은 눈썹 사이로 주름살이 움푹 파여있었다. 노란 두 눈을 신경질적으로 연방 깜빡거리면서 한시도 쉴새 없이 이곳저곳에 시선을 돌려대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봐서 인상이 찡그린 돼지의 면상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바로 망국의 길에 들어선 한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었고 코레아의 마지막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드디어 내가 배알할 차례가 되었다. 통역관이 나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것과
장군의 신분으로서 코레아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황제 폐하의 말씀을 전했다.
대답하기가 꽤 난처한 질문이었다. 불현듯 남이 칭찬을 바랄 때는 칭찬을 하는 법이지 꾸중을 하는게 아니라는
옛말이 생각나서 코레아 군대의 질서 정연함 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이 외교적인 답변이 황제의 마음에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고 태자도 이를 따랐다.
(아손은 조선의 기생에 대해 관찰하고 싶어서 독일 공사에게 조선 기생들을 초청해달라고 부탁한다. 독일 공사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평양 기생과 어떤 젊은이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코레아 기생과 데스보르데스 젊은이
“우리 젊은 외교관들 중에는 기생에게 반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불상사가 한번 일어났는데, 데스보르데스란 젊은이가 평안에서 온 기생과 결혼을 한것으로부터 일이 비롯되었지요.
그 젊은이가 기생에게 빠져버려 저희들이 간곡히 만류해보았으니 구제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개종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 부부는 사이공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젊은 부인은 마카오에서 온 포르투갈 출신의 다이아몬드 상인과 눈이 맞아 도망을 해버렸고,
젊은 데스보르데스는 이마에 총을 쏘아 자살했습니다. 불행한 사건이었으나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 다행스럽니다.”
(아손은 조선의 사형집행과 처벌에 관심이 많아서 감옥을 방문했다)
코레아 간수장을 만나다
간수장은 스웨덴이란 나라 이름을 생전 들어본적이 없으며, 스웨덴으로부터 어떤 대신이 서울을 방문해 머물다가
간 사실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지도를 대강 그리고, 윤산갈(통역)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이란 나라는 유럽에 있는 강대국 중 하나며
코레아와 같은 소국에는 대신들을 파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
간수는 똑바로 이해하지 못한게 확실했다. 내 등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보고 이마부분에 와서는 오랫동안 관찰을 하였다.
한동안 말이없어 벙어리가 된줄 알았던 윤산갈이 말했다
“간수장께서 궁금해 하시는 점은 스웨덴이란 나라가 이마에 눈이 하나만 달린 족속들이 사는 그 나라가 아닌가 하는것입니다..”
윤산갈은 통역을 했고 간수장의 말을 전했다.
“간수장께서는 스웨덴 사람들이 등에 뿔을 달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다...”
간수장은 스웨덴에서는 중죄인에게 형벌을 줄 때 몸을 네조각 내는지 (능지처참을 이야기 하는듯)
아니면 수레를 사지 위로 지나가게 해서 사지를 못쓰게 만들어 해놓는지 궁금해했다.
산적 두목의 처형식
40대쯤 되어보이는 그는 턱에 수염이 텁수룩하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정도로 말랐다.
여윈몸을 넢은 누더기가 다 된 옷은 그가 그동안 살았던 감옥이 얼마나 더럽고 불겼했는지를 나타내주었다.
그는 산적 우두머리로 그의 손에 2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당시 밤에 한성 밖에만 나가도 조선에는 사람 죽이는 산적들이 들끓었다고 아손이 기록함)
죄수를 묶는데 사용되었던 피 묻은 밧줄을 그의 다리 여러곳에 동여 맸다. 양팔을 옆구리에 묶어 한치도 움직일수 없게 하였다.
집행인은 그의 몸을 밀어 땅바닥에 고꾸라지게 하였다. 사형집행인들은 굵은 막대기를 각자 손에 들었다.
윤산갈은 새파란 얼굴이 되어 붙잡을 틈도 없이 달음박질해 사라졌다. 그 뒤 나는 사형 집행의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그 자리를 피한 윤산갈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아손이 직접 찍은 처형 사진)
대막대기의 용도는 주리를 트는데 있었다. 죄수 안다리에 막대를 집어넣어 집행인들은 자신들의 온몸의 무게를 막대 끝에 넞었다. 죄수가 연달아 토해내는 비명은 듣기에 처절했다. 다리뼈가 부러져 으꺠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사형수의 처절한 비명도 멎었다.
얼굴은 죽은자의 그것처럼 핏기가 싹 가셨고 두눈은 흰쟈위만 남았고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져내렸다.
사형집행인들이 막대를 빼내고 다리뼈가 완전하게 부러졌는지 확인해도 그는 느끼지 못하는 양 죽은듯이 누워 있었다.
기절한 죄수는 한참후 의식을 회복해 신음소리를 토했다. 집행인들은 죄수의 팔뼈와 갈비뼈 사이에 대막대기를 집어넣어 이뼈들을 차례차례로 부러뜨린 다음, 마지막으로 비단 끈을 사용하여 죄수의 목을 졸라 죽여 시체를 질질 끌고 나갔다.
외국인이 평가한 코레아의 미래
서울의 거리들을 오랜 시간 산보한후 피에르 형제는 호텔까지 나를 동행했다. 우리는 엠버얼리씨와 어울려 유쾌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이 두사람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지금 다시 반복하는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코레아인들과 일본인들의 국민성에 대한 자신들의 풍부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많은예측을 하였다. 그 예측들은 내가 코레아를 떠난 후 역사가 되었다. 그들이 펼쳐보인 코레아의 미래는 밝은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정체해 있는 한 민족을 기다리고 있는것이 암담한 미래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한국 역사학자들이 아름답게 미화하고 포장한 조선의 역사만 읽다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문명국 스웨덴 기자가 보고 경험한 봉건시대 조선의 모습은
우리가 믿었던 모습과 상당히 달라서 놀라웠다.
이밖에도 재밌는 일화가 아주 많으니 더 읽고 싶으면 직접 사서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