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서를 이어받으면, ‘권위주의’나 ‘중국 민족주의’ 뿐 아닐까?
-종교로서의 新羅는 우익의 미래일까?-
자한당 정치인들은 꾸준히 모든 대학가 학술자료를 허락하는 토대가 되면서도, 일관되게 93년 이전 자료를 사용한다. [새마을 노래] 가사인 ‘삼국통일’이룩한 화랑의 옛 정서에 들떴던 어린이는 이제 멀지 않은 시간에 50세(이, 끔찍한 나이!!)가 된다. 조갑제 기자는 무려 40여년의 시간차이를 넘어서서,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노래’정서를 우파에 세일즈한다. 그러나, 그 갭을 메우는 게 사실은 갭 없이 ‘시간 건너뛰기’하는 70대 친화성보다 우선 아닐까?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게 있다. 결정적으로 中國學과 신종교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고 세밀해졌다. 新羅는 박정희 때는 누구나 그랬듯이 ‘상상 세계’였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관을 딧따 싫어하는 지배엘리트인 좌좀 덕분에 ‘중국인’들의 중국학 성과가 대거 유입됐다.
1) 新羅는 유교와 불교가 공존한 지배이데올로기였다.
-맨 먼저 ‘강유위’의 [대동서]로서 대승불교 인간관계로 맺어지는 중국위주의 국제관계론이 떠올라진다.
一心은 곧 王의 이야기고, 중국 불교는 그렇게 유교의 대동세상 코드와 쉽게 겹친다.
이렇게 한 분이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이다. 그리고 신라시대는 원효대사가 있다. 원효대사의 아들이 불교를 버리고 유교로 입장 바꾼 것을 생각해보면, 그 시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2) 고도의 신분제 카스트 사회였다.
- 군사정권 때는 ‘화랑’의 만장일치를 민주적 절차라고 소개했다. 철들고 보니, 암만 봐도 화백제도에서, 평양돼지 인민위원회(만장일치의 독재적 형태) 잔영이 어른 거린다. 물론, 고대사회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고대>가 <미래>다 라고 설정하는 것 자체의 힘겨움이다.
3) 파벌간의 끝장보기식의 싸움이 빈발했다. ‘관직’을 두고.
-원효대사의 대승불교가 나오게 된 계기를 생각하면, 신라 사회의 특징을 느끼게 된다. 자한당에서는 어찌하여 ‘영남권’인데도, 그렇게 파벌 상호간을 연결하는 사고방식은 없나? 물론, 상호간을 잇는 것이 원효대사는 신라 왕을 중심으로 하나,..... 그것조차도 난감하다.
4) 나당연합군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흡수될 영역이지, 한미동맹의 비유는 될 수 없다.
중국인에 당나라가 무엇인가?
중국인의 중국문명권에 ‘로마’라고 자뻑 단계다.
5) 화랑의 용맹성 조차도, NL파 시조인 단재 신채호가 중국의 군벌의 탄생에 해당되는 것의 기원 찾기에 가깝게 나타난다.
6) 그러면, 한국정치는 종교로서의 ‘신라’를 왜 논했는가?
- 고구려 및 백제의 과거사에는 ‘도교’와 무정부 사회주의의 잔영이 깊다. 다시 말해서,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해석 방식에서 해석자의 사회주의적 가치와는 무관한게 ‘신라’ 뿐이다.
(고구려나 백제를 둘러싼 어떤 과거사 진흥도 별 임팩트가 없다)
- 우파의 엘리트가 영남 사람이 많았다.
- 우파 신종교인들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7) 신라의 삼국통일은, 과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통일국가의 미래일까?
-[삼국 유사]는 통일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나온다.
즉, 전쟁 통일을 거쳤고, 그 후유증으로 몰락한게 신라가 걸었던 길이다. 특히, 정복당한 씨족이 ‘후백제’란 이름으로 터져 나오는 모습은, 오히려 잘못된 모델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8) 결국,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신라’가 아니라, 후천개벽과 해원상생의 땜빵 심리로서 자아라는 우파 신종교의 자아인식이란 주관적 만족이 전부인데,... 법치주의와 시장경제 질서와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간다.
나당연합군에서 드러나듯이 중국 문명 전성시대에 중국문명 변방의 모습의 세팅이라고 보인다. 중국학 성과가 너무 세밀하니까, 엔간한 주장은 “우리 고유”란 말을 쓰기가 민망해진다. 1948년 자유민주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그리운 시간이 어디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