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불 ~~ 석가모니불 ~ ~ ~ 석가모니불
선요약
자비란 무엇인가 ?
불생의수레바퀴 인생사에서 사바하의 세계는 한낮꿈의 한조각이요 찰나의순간에 불과하거늘
무엇에연연하는가 번뇌와 잡념을 버리도록 노력하고 정진해야하거늘 사바하의 속세적 욕망이 너무커서
분노 복수등 아수라들처럼 분노적 언사를 사용하는가
더욱더 정진하고 수양하여 본인육신의 카르마를 승업시켜 니르바나에 이를때를 대비하여야 한다
석가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30대에 해탈에 이르셨으나 불완전한 육신으로 인해 티끌만한 변수가 있었으나
입열반에 이르셔서 그변수를벗었다 ......성불하시게
-사바하- 살생은 금물이나 빨갱이는 죽여도돼
파드마삼바바 사자의서 참조
짥은요약
사바하의 세계가 모두 부질없는거 아니겠는가 찰나의 속세에 그무엇을 바라리요 성불하시게 석가불 !
부족한 땡중이 불법을 적는라 많은 노고를 하였소
부족하지만 많은 중생들이 이설법을 볼수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시주좀 넉넉히 주시길 빌어보오
글쓴이의 서문
힘들때마다 망각할때마다 죽고싶을때 나쁜마음이 들떼마다 이글을 읽고 또읽어라
이가르침대로만 살아도 너는 작은부처 인것이다 위에 불경노래도 들어라
티벳불교서적에서 이르면 우리몸은 카르마의 형체를 띄고있고 그업에따라 원형의 에테르 카르마로 사후에 중간계에서발현된다 거기서 선택의 순간이옴 니르바나 이르러 비로써 본인의 업과 성찰에 따라 카르의 기운과 색이 달라지고 선택받는다 다른업으로
두려워 말걸라 존귀한자여 앞에 보이는 밝은빛을 따라가라 등등 이런식으로 기도문 법경이 존재함 불순한 카르마일수록 밝은빛에 놀라 본능적으로 회피해서 저급한 중간계로이동함 - 아 윤회의 수레바퀴요 !그래서 티벳승려들이 장례치를때 원형으로 돌면서 사자의 안식주문 외움 망자의 카르마가 니르바나의계에서 다음 윤회의 선택을받음
그리고 해탈한자만이 그럼 윤회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 지는거지 한단계 승업되는거다그래서 티베트나 그쪽 고대불교 영향받는 네팔이나 부탄가면 윤회의 종이나 작은 불경돌림판이 존재하쟌아 그래서 그거한바퀴 돌려도 업이 승화된다고 관광객들도 거기가면 다들 한바퀴씩 돌리쟌아 가끔 티브이에도 나오쟌아 윤회의바퀴 돌림판
1 깨달음의길/ 붓다의 해탈
여기 여래의 불법이 있으니 중생들은 들으라
여래께서는 35세에 보리수아래에서 해탈에 이르셔서 삼라만상의 깨우침을 얻으셨다
해탈이란 무상무념 그이상의 것으로 모든삼라만상의 위에서서 혜안을 얻고
모든만물의 형상에대한 깨우침을 얻은상태이다
그리고 윤회의 수레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존귀한 선한카르마 그자체이노라 그길의 끝은 니르바나
여래께서도 비록해탈에 이르셨으나 불완전한 육신을 가지신바 육신에의한
티끌만한 변수를 지니셨으나 이르어 입열반에 오르시니
그 티끌만한 변수와 번뇌마저 벗어던지시니 천상의 것이로다
자들으라 여기 여래의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또한 부처가 될수있도다 수련하여 또수련하여 득을깼다고 인을터득하여 번뇌의 어리석음을
벗어던지고 수련하고 명상하여 그이치를 깨닫는다면 너희또한 생불 부처이니라
그러니 선한마음과 선한업을 쌓아서 선한카르마를 보유하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오른다면 니자신이 여래이니라
그것으로 윤회의 번뇌로부터 벗어날수있는 선한카르마를 보유하게 될것이다
그선한 카르마가 너를 사후에 윤회의길로 인도하지않고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것이다 니르바나!
보편적인 세 가지 진리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둘째, 모든 것이 덧없다.셋째, 모든 것이 실체 없다.
이러한 세 가지 진리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으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불교는 이 세 가지 보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고 보았던 붓다의 관점은 종종 염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에 대해서 불교의 논사(論師)들은 절대적인 부정 위에서만 절대적인 긍정이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곤 했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진실을 똑바로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행복이든 불행이든 결국은 모든 것이 고통일 뿐이라는 진실을 깨달은 후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한 마음을 견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깨달음이다. 또한 모든 것이 고통인 까닭은 모든 것이 덧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생겨난 것은 차츰 변해 가고 마침내 스러져 간다. 한 찰나의 순간조차 전혀 변화 없이 고정된 채로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진실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바로 이것이 붓다의 또 다른 깨달음이었다.붓다 당대에 슈라마나 교단으로서 유력한 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자이나교라든지, 브라마나 교단에서는 영원한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의 진리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데서 매우 독창적인 차별성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왜 덧없을 뿐인가? 모든 것은 불멸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 그 무엇도 영원한 고정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또 하나의 진리이다. 이러한 세 가지 진리를 철두철미하게 깨닫는 것은 곧 불교의 고갱이를 아는 것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이, 붓다'와 다를 바 없는 경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고귀한 네 가지 원리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였을 때, 그 사상을 다음 같이 요약해서 말하였다."네 가지 원리를 알아야 한다.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과 그 고통을 없애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이러한 네 가지 원리는 사성제(四聖諦)라고 한다.
제1 성제는 고통이라는 원리이다.제2 성제는 고통이 생겨나는 원리이다.제3 성제는 고통이 없어지는 원리이다.제4 성제는 고통이 없어지는 길에 대한 원리이다.
붓다는 거듭 말하기를, 이러한 네 가지 원리는 우리의 삶을 해탈과 니르바나의 경지로 이끌어 주는 평온한 의지처이자 최상의 의지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원리에 따라서 수행해 나간다면 누구든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한량없는 복덕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현실적인 고통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강조했던 까닭은 붓다가 출가했던 동기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은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그 지혜를 얻었다고, 그 길을 보았노라고 선언했다.
여덟 가지 올바른 길
붓다는 스스로 깨닫고 그 자신이 확신하는 길, 즉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갈래의 길(八正道)이라고 하였다.
첫째 길은 올바른 견해이다. 이것은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다.둘째 길은 올바른 사유이다. 이것은 욕망이나 악한 생각에서 벗어나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셋째 길은 올바른 언어이다. 이것은 거짓말이나 모욕하거나 속이는 말 등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넷째 길은 올바른 행위이다. 이것은 생명을 죽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부적절한 음행에 빠지는 것 등 일체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다섯째 길은 올바른 생활이다. 이것은 부적절한 직업으로 생계를 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여섯째 길은 올바른 노력이다. 이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한 일조차 하지 않도록 미리 애쓰는 것이며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는 것이다.일곱째 길은 올바른 유념이다. 이것은 자신의 몸과 감정, 생각과 마음 등을 잘 관찰하여 그릇된 견해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를 다하는 것이다.여덟째 길은 올바른 명상이다. 이것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번뇌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여덟 갈래의 길을 수레바퀴에 비유하고 있다. 예컨대,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유념 등의 넷은 바퀴살을 이루고, 올바른 언어와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등은 가운데 바퀴통이 되고, 올바른 명상은 바퀴 테가 되어서 하나의 수레바퀴가 온전히 굴러 갈 수 있도록 서로 돕는다. 그리하여 여덟 갈래의 올바른 길은 마치 거침없이 굴러 가는 수레바퀴처럼 우리들을 저 피안의 니르바나로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토대로 한 가르침은 팔정도(八正道)의 수레바퀴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상인 법륜(法輪)의 토대가 되었다.
존재의 열두 가지 원리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철학과 종교들이 해탈을 추구하며 니르바나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해탈과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길이 어떻게 다르냐에 따라 각각의 학파와 종파가 나뉘었다.불교에서도 역시 해탈과 니르바나를 추구하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다른 학파나 종파와 달랐을 뿐만 아니라, 존재와 세계에 대한 관점도 매우 독특했다. 붓다는 존재와 세계에 대해 12인연설로 설명했다. 12인연설이란, 열두 가지의 요소들이 서로 인과 관계를 이루어, 윤회 전생하는 존재의 삶을 지배한다는 이론이다. 열두 가지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등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명은 4제(諦) 등의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의 근본인 무지를 말한다.둘째, 행은 무명으로부터 다음의 의식 작용을 일으키는 상(相)이며, 우리가 짓는 모든 업을 뜻한다.셋째, 식은 인식 주관으로서의 6식(識)이다. 6식은 여섯 가지 인식 작용을 뜻하며,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라는 6근(根)에 의존하여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라는 6경(境)을 지각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을 말한다.넷째, 명색은 명과 색을 합친 말이다.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 또는 정신을 명(名)이라 하고, 형체가 있는 물질 또는 신체를 색(色)이라 한다.다섯째, 육입이란 안, 이, 비, 설, 신, 의 등의 6근을 말한다.여섯째, 촉은 감각과 지각 등의 성립 조건인 6근, 6경, 6식 등이 만나서 생겨나는 것이다.일곱째, 수는 6근, 6경, 6식 등이 만나서 촉을 이루고, 그 후에 생기는 고통, 쾌락 등의 느낌을 말한다.여덟째, 애는 욕망의 만족을 바라는 욕구와 열망, 갈애 등을 말한다.아홉째, 취는 자기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집착을 말한다.열째, 유는 윤회하는 중생의 생존계로서 3계(界) 25유(有)를 말한다.열한째, 생은 중생이 어떤 부류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열두째, 노사는 태어난 뒤에 차츰 늙어서 죽는 것으로서 중생의 모든 고통을 대표한다.
이 12인연설은 연기설(緣起說)이라고도 한다. 연기란 서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즉 존재란 어떤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하여 성립된다. 따라서 인연에 의해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성립되어 있을 뿐이며,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컨대 연기설은 사물의 존재와 성립에 대한 법칙을 밝힌 것이며, 동시에 불교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데 근간이 되는 이론이다.12인연설은 초기 경전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다소 도식적인 열거와 반복을 통해서 상투적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연기설의 이치는 붓다 당대로부터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파장과 깊이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대표적인 불교 진리이기도 하다.
무지한 세상을 향한 북소리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자신이 깨달은 진리는 매우 심오하고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욕망과 쾌락에 젖어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피로하고 성가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늘에 사는 범천이 붓다의 그 마음을 알아채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그 진리를 설한다면, 지혜를 얻게 될 중생들이 있노라고, 아직 때가 덜 묻은 중생들이 있노라고, 간절히 권유했다. 그러자 붓다의 마음이 흔들렸다.마치 연못 속의 청련, 홍련, 백련 등이 물속에서 자라나 때로는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물속에 잠겨 있거나, 때로는 물 위로 솟아나 더러움을 떨치고 꽃을 피우기도 하듯이,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으며,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가르치기 쉬운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드디어 붓다는 진리를 널리 펴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범천(梵天) 권청(勸請)'으로 알려져 있는 설화의 요지이다. 범천이 굳이 청하여 붓다가 진리를 펴게 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그런데 그 이야기의 사실성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붓다가 스스로 어렵사리 깨달은 진리를 욕망의 때에 젖어 있는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붓다의 진리가 세속적인 욕망의 세계와는 대극점(對極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이야기가 바로 범천 권청 설화이기도 하다. 결국 설법을 하기로 결심한 붓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베풀기 위해 길을 가다가 맨 먼저 아지비카 교도인 우파카와 마주쳤다. 그 때 붓다는 우파카에게 이렇게 말했다."나는 스승이 없으며, 나와 동등한 이도 찾을 수 없고, 신들의 세상에도 나와 같은 이는 없다. 내가 가장 존귀하고 내가 가장 뛰어난 스승이며, 홀로 완전히 깨달았고, 평정한 니르바나를 얻었다. 나는 지금 법륜을 굴리고자 카시 마을로 간다. 무지한 세상에 불사의 북을 치면서."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펼치기 시작한 붓다, 그의 음성은 무지를 깨뜨리는 불사의 북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