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대화에서 남북한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가 의제에 올라야 한다.
-북한체제 보장만 허락하면, 남북한기독교인은 북한공산당에 죽으란 이야긴가?-
가. 모든 문제는 老莊思想(도교군주) 우주관이 플라톤주의와 같다?는 속임수에서 싹텄다.
미국과 북한이 대화하고 있다.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지라도, 미국과 북한은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라는 헌법정신에 수렴돼야 한다. 즉, ‘지유민주적 기본질서’라 함은 ‘국가독재’ 나 ‘민중(인민)민주주의’나 ‘파시즘’ , ‘볼셰비즘’ 등 모든 형태의 偶像化를 통한 권력집중 형태에 반대하는 것이 돼야 한다. 미국과 북한의 대화는 ‘북한 체제 보장’이라는 북한공산당의 해체가 아닌 경우를 전제로 깔고 있다면, 북한공산당의 권력적 활동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를 깔고 있다.
고려연방제는 주체사상 공산당 기능 하에서 작동한다. 북한공산당 자체가 ‘당성’과 ‘당파성’을 유교의 충성 잣대로 밝히는 유교 군주론과, 그 이외의 것을 눈감으면서 존재하는 ‘도교 군주’의 종합이다. 90년대 중후반에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해도 북한공산당이 변하지 않았던 것은, 북한공산당의 존재 방식 때문이다. 북한공산당이 주체사상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북한 지역 공산당원을 주체로 참여시키는 사실상의 ‘국영기업’(북한공산당 자체, 혹은 북한공산당이 주도적으로 개입된 서방세계와 합작)을 늘리겠다는 이야기다. 남한 사회에서는 북한에 ‘퍼줘야 한다’는 여론몰이로 충성고백을 하는 집단들에 보상을 하는 것 이외에는, 방임하는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여지나 충성 집단이 늘어날수록, 그들에 보상차원으로 관리를 맡기면서 그 영역이 줄어들 것이다.
‘한반도’에서 고려연방제가 왕성하게 활동할수록, 가장 피해를 받는 집단이 존재한다. 이는 기독교인이다. 물론, 피해 받지 않는 기독교인도 존재할 수 있겠으나, 일제 말에 ‘신사참배’하는 수준의 변절을 자신이 이미 했다는 사실을 인식 못하는 경우만 가능하다. 고려연방제는 한반도의 운전자를 김정은이 쥐기 위한 ‘정치적 상징’의 매스미디어 도배 없이는 작동되지 않는다. 고려연방제 작동을 위한 ‘정치적 상징’은 중국 씨족 종교에서의 ‘유교 군주’와 ‘도교 군주’의 양상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마주 잡은 손>은 <노무현과 김정일의 마주 잡은 손>으로 바뀌고, <김정은과 좌파 정부 지도자의 마주 잡은 손>으로 바뀌었는데, 이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는 ‘군주 신앙’상징물로 작용한다. 그 상징은 국민들을 민중신앙 속에서 무릉도원 현실화 상상을 일으켰다. 국민상호간에 어떠한 소통적 발전을 이룬 것도 아니고, 국민의 사고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국민대중이 ‘무릉도원’ 현실화 상상에 독일파시즘 사회 대중처럼 몰입하는 것이 나타났다. 물론, 과거처럼 모든 형태의 신앙을 전부 봉쇄하던 시대와는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미 세계 시민들이 전부 누리고 있는 수준의 ‘신앙의 자유’는 크게 훼손돼야만 가능하다. 親北左派는 ‘신학대’와 ‘교회’에 개혁이라는 명분하에, ‘충성고백’을 늘려나가는 일을 가하고 있다.(이건, 알고 있나? 세계교회협의회 지도부 들아!!)
중국문화 속에서 유교와 도교의 황제신앙이 겹쳐지는 것은 이러한 논리로 나타날 것이다. 국민을 환상의 세계로 보내줄 수 있는데, 어떤 세력의 존재 떄문에 문제가 된다는 주장으로 박해를 유도하는 것이다. 극장의 영화가 만약에 어떤 침입자로 중단된다면, 관중은 그 침입자를 거세게 성토할 것이다. 조선왕조를 살아간 전체 민족이 공유한 ‘이상세계’는 중국이 심었던 ‘무릉도원’이다. 좌파정부가 국민 세금을 막대하게 써가면서 하는 것은, 한국의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 빚어지는 ‘샤머니즘 제정일치 정치 쑈’였다.
2018년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히틀러 독일 파시즘 사회와 독일 교회와 겹쳐질 수 있다. 히틀러 파시즘 때는 ‘서구 자유주의 신학’이 있었다면, 2018년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는 ‘중국 씨족신앙’의 영향이 깔린 <한국판 자유주의 신학>이 적용됐다고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헬라 인본주의가 아니라 계룡산 무당신앙 영성이 지배해서 형성된 것이란 이야기다. 2018년 한국 교회는 서구의 첨단 신학을 목회현장의 성도들이 공감하는 것과 무관하게 마구잡이로 수입되고 있다. 이는 신학대학이 ‘성균관 유생’으로서 ‘명 나라’에 충성바치며 하는 관습의 복제일 것이면서, 성도들이 ‘신학내용’이 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전문가에 의존하도록 하는 전략이라고 파악된다. 표면적으로는 1945년 이후 세계교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만연으로 ‘칭의’가 약해지는 경향과 맞물리지만, 이는 한국 사회에서 민중신학 세력 지배화에서 기인한 易복음화(중국문화 확장)에 교횟말을 포장해서 덧 씌우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는 두 개의 전혀 다른 문명권에서 같은 점을 강조하고, 다른 점을 고의로 은폐하는 전략에서 존재했다. 즉, 서구 좌파 기독교 영성에 깔린 동방기독교의 기반인 플라톤주의와, 중국 문명 道敎 군주론에 깔린 老莊사상을 같다고 보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 일반민중이 헬라인본주의에 빠졌고, 한국에 귀족과 무관한 일반민중이 샤머니즘 신앙(무당신앙)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동일성보다는 차이성이 뚜렷하다. 플라톤을 소유했던 사회는 민간 문화가 발전했다. 그러나, 샤머니즘 문화가 존재한 공간에서는, 씨족 연고주의에 구분돼 민간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민법은 1958년에 제정돼서, 1960년에 시행됐다. 그리고, 그렇게 시행되는 민법 문제도 ‘금전채권’문제에 비정상적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두 개를 강제로 같다고 보게 되면, 조선왕조 임금이 유럽사회의 ‘로마 교황’과 동일시된다. 아시아 문명에 대한 끔찍한 왜곡과 오해가 발생한다. 이렇게 한국을 오해한 외국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가 한국에 수입돼 국민대중을 왜곡시킨다. 한국 국민을 대변해야 할 부분이,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단 한번도 검증을 받지 않고 퍼지게 되는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차별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 서구 사람들은 한국에 동방기독교 영성에서 가능한 플라톤주의가 있는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를 신학대 간의 신학적 차이로 환원하는 흑백논리로 하면 좌익의 무조건 勝利다) 한국인들이 사고하는 동성애 문제는 ‘차별없는 세상’을 주도하는 무당사제로서 좌파정치 지도자를 생각하고 무릉도원을 생각한다.
脫원전은 ‘환경’을 생각하는 발전을 지향한다. 서구 사람들은 한국에 동방기독교 영성에서 가능한 플라톤주의에 수렴되는 자연인식이 있는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를 신학대간의 신학적 차이로 환원하는 흑백논리로 하면 좌익의 무조건 勝利다) 작년 여름에 문을 활짝 열고 에어콘을 펑펑 트는 가게상점이 드물지 않았고, 올해 여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인들이 사고하는 脫원전은 ‘원전’을 없게 해도 되는 무당사제로서 좌파정치지도자를 생각하고 무릉도원을 생각한다.
老莊사고를 끼는 도교 군주담론의 우주적 관점을 서양 시민 문화 속의 ‘플라톤’적 우주관과 똑같다고 본다면, 그러면 서양의 좌파세력이 주체사상 공산당 김정은에 서양 문화에 존재하는 어떤 일부인양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가 파괴되는 현장은 ‘불법적인 탄핵’과 그 정치적 동원으로서 촛불 운동이, 서양의 정치적 민주주의처럼 비춰질 것이다. 좌익 역사책은 ‘단군’시대를 씨족 노예제 사회로 다룬다. 그러나, 1970년대에 토착화신학자 윤성범씨는 ‘단군’신화 속에 동방기독교 영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단군신화는 불교 신앙을 가진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담겨 있는데, 한국의 불교가 중국 불교의 수입이고 중국 불교가 老莊사상의 영향인 배경이 ‘단군신화’에도 수록돼 있다. 단군신화를 기록한 작성자인 일연의 신앙은 불교지만, ‘단군’신화의 기록은 매우 老莊사상적이었다. 이 두 개가 같다, 고 전제한 서양인의 착각을 수정하고, 같다는 전제로 한국 사회에 퍼진 文化를 무너뜨려야 하는게 우선이다.
老莊 사상을 품은 무당신앙(성서의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조선공산당과 연합하며 존재한 일제 시대 민족해방운동사 상에서 기독교사회주의 운동의 가치판단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동시에 성서의 예수만을 인정한 일제 강점기 장로교 중심을 부정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6.25 전쟁 때 공산군의 기독교인의 박해사에서, 박해당하고 순교당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박해자’의 시점에 일치시키는 문제와 연결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미숙했던 상태에서 불가피한 종교혼합 상태를 공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억울하게’ 보일 수는 있다. 문제는 그런 단계가 확실히 넘어선 시점에서, 고의로 특정 이해관계 씨족의 이익을 위해서 성서의 하나님이 아닌 한국 민족의 중국문명과 연장되는 자연 神을 하나님으로 부르자는 문제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중국문명의 ‘자연 神’을 하나님으로 부르게 될 때, 레닌이 말한 ‘현대의 君主’로서의 공산당이 교회의 신앙 대상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북한 김정은을 한국교회가 일제 말기 파시즘 때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설정되는 일왕(일본 천왕)에 신사참배하던 관습으로 긍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도 된다.
한국 교회는 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主로 고백한다는 ‘한국판 고백교회’운동이 필요하다. 성서밖의 자연 神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문화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한국교회 붕괴를 동시에 가져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한국교회 붕괴를 동시에 가져다주는 세계교회협의회 하의 ‘독일 교회’와 ‘미국 북장로교’는 그 몸통 세력과, 한국 보수 교회 사이의 ‘오해’를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성서 밖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한국 좌파 교회에 있어서, 정치신학도 철저하게 왜곡됐다. 대부분의 기독교정치참여 논설은 유교의 內聖外王의 변주곡이어왔다. 사회적 삼위일체로서 종말론적 부활신앙은 신종교 무당신앙의 후천개벽 정역사상에 덧 씌워졌다. ‘정치신학’에 있어서도 主가 예수 그리스도임은 달라질 수 없다. 사회적 삼위일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主로 고백하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서의 교회 문화가 존재해야, “사회적 칭의”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엘리트 층 자체도 성서를 넘어서서, 철학과 인문학의 이해가 깊어진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2000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신앙적으로 미숙했던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도 결국은 모든 기준은 ‘성서적 신앙’이 우선이지, 성서 밖의 논리(인간적 문제)가 아니어야 한다.
신학의 어느 구석에서든 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철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사고하고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지 못했으며 그런 명령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는 신학자로 하여금 성경 중 그 어느 주변적인 것도 소홀히 여길 것도 허락지 않으며, 어느 한 부분을 고립시켜 추상적으로 만들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을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이 중심(예수 그리스도)은 신학자에게 성경 중 그 어떤 것도 중심이 되는 것을 허락지 않으며, 자신과 경쟁하는 제2의 중심을 만들도록 허락지 않는다. 중심이 하나인 원이 중심이 둘인 타원형이 될 때 소종파주의, 이단, 혹은 배도에 떨어질 것이다.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 그러나 나와 더불어 모으지 않는 사람은 흩는 사람이다.
진정한 신학적 인식의 첫 번째 표준이란 이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으는 인식에 있다.(칼 바르트, 100-101쪽, 이형기 역, 『복음주의 신학 입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6)
나. 이신칭의
개신교의 믿음은 만인제사장 원리로서 성도가 각각 사제가 되며, 다른 사람의 신앙적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분리가 된다. 동시에, 가톨릭 귀족계급과 비슷하게 존재했던 ‘신종교 종교지도자’나 ‘유교’의 양반귀족 문화와도 단절이 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아직도 ‘칭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다. 2018년 한국 사회는 ‘귀족의 갑질 욕망’과 ‘대중의 무책임욕망’이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연결되는 ‘자유’의 타락이라고 보아야 할 부분이다. ‘신종교’신앙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됐던 장년 고학력층이 한국교회를 파괴할 수 있는 상태로 유도했고, 이를 한국교회는 자꾸 순응하는 형태로 흘러갔다. 그리고, 교회의 몸집 확장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성서적 신앙’이란 토대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빈발했다. 이에, 세계 교회협의회는 ‘종교개혁시대’에 독일 민족에 가했던 양상보다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 않은, 엉뚱하고 생뚱맞은 개입으로 일관했다.
독일 교회에서 ‘루터’처럼 교회 신앙의 혼란이 있을 때마다 돌아갈 지점이 한국교회에 있다면, ‘민족복음화’ 신앙일 것이다. 민족복음화 신앙은 개신교의 칭의 신앙이 전 국민적 확장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국민책임의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군사정권 때는 명백한 한계도 동시에 존재했다. 2018년 입장에서 군사정권 때의 그 한계성까지를 복원하자는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 교회’의 저항운동처럼, ‘한국사회’에서 <성서의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한다>는 고백교회 운동의 한국판 버전이 벌어진다면, 충분히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중국 신앙 자연 神’에 덧씌워져 오는 政敎一致 고대국가 지향을 통한 사회주의 지향성에 대하여, 성서적 저항을 하는 한국교회 전체의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목숨을 걸고 脫北한 탈북자에 대해서 좌파정부는 북송을 검토한 바 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건전한 정부의 행위가 아니라, 스탈린 사회주의 ‘一國一黨’노선 복종이란 국민의 정상적 위임을 받지 않는 행위를 시도한 것이다. 이는 ‘남북관계’가 물상화된 의식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좌파가 선전선동하는 神話(myth)를 깨뜨리는 연쇄작업 없이 위기의식만 고조한다고 국민이 정신차릴 수 없다. (‘히틀러 파시즘’에 포획된 대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정신차릴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스탈린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은 한미동맹파 국민들에게, 국민이 한번도 위임하지 않은 좌익 씨족간의 이익을 위한 불법적 행위가 발생할 것이 예상되는데, 국제사회가 이에 이미 속아 넘어가고 있다. 속아 넘어가고 있는 제일 앞잡이에 세계교회협의회를 주도하는 독일 사민당 편향의 독일교회와 미국 북장로교가 자리하고 있다.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칭의에 있어서 ‘의’는 법정적, 종말론적으로 심판하실 하나님에 대한 사면을 전제한다. 석방, 온전함, 재판, 공의, 권리, 의, 구원등의 여러가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구약에서 ‘의’는 하나님이나 사람의 구체적인 행동과 관련된다. 구약에서 ‘칭의’는 ‘의롭다’(창 38:26, 욥 10:15), ‘의로운자로 증명되다’(욥 32:3, 33:32), 의롭다고 선언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의‘라(창 15:6)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재판관들은 의로운 자를 의롭다고 하여야 한다. (신 25:1)>와 <재판관들은 가난한 자에게 죄가 없으면 의롭다고 하여야 한다.(시 82:3) >는 의미를 포함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관계를 박살을 내 버린다. 신약에서 칭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적 행동이다. 믿음은 회개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속한다.(출 19:5)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없으며(갈 2:16, 3:11, 롬 3:2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믿음(롬 3:21)에서만 의롭다 인정 받을 수 있다. 신약에서 이신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롬 3:24-26, 4:24-25, 고전 1:30, 6:11, 딤전 3:16, 벧전 3:18)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 개념에 대한 발견은 ‘십자가 신학’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한 부분이다. ‘의’가 선을 선으로 보답하고, 악을 악으로 보답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죄가 있는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있는가? ‘칭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관한 질문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의’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관한 질문이 존재한다. 루터에 있어서 ‘믿음의 의’는 ㉠ 하나님에 속한 의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준 선물로서의 의이고, ㉡ 인간 앞에서는 유효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유효한 의이며,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의 의이다. 그리고,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롬 3:22-24, 갈 2:21) 구현된다. 믿음은 겸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낮고 낮은 곳으로 곤두박질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 분의 자비로운 약속에 의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도록 드리는 전적인 비하를 위한 기도이다. 그리스도의 자기비하가 결과적으로 그를 영화로 이끌었던 것처럼, 사람은 자신을 낮고 낮은 곳으로 낮춤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하여 높고 높은 곳으로 높여진다. 루터가 겸손을 믿음의 필수적인 결과로, 그리고 의롭게 됨을 위해 동등하게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 하나님과 올바르게 됨이라는 속죄(롬 3:25)의 의미, ㉡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고후 5:8-20)이라는 의미, ㉢ 양자됨 (롬 8:15, 23, 갈 4:5)이라는 의미, ㉣ 변화됨 (롬 12:2, 고후 3:18)이라는 의미, ㉤ 거룩하게 됨, 또는 성별됨(고전 1:20, 30)이라는 의미가 있다. ‘믿음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 사제의 은총에 의한 칭의가 지배했다. 중세는 사제와 수도승이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다. 교황은 독일교회의 직책과 성직록을 소유하고 있었고, 대죄와 중죄에 대한 사면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로마 교회의 약탈적 관행의 극치가 면벌부 판매였다. 다양한 방법으로 교황은 교회의 권력과 수입을 독일인의 수중에서 로마로 옮겨 갔는데, 이는 독일인에게 막대한 손실이었던 반면에 로마 교회에는 커다란 이익이 됐다. 구원을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 또는 업적의 공로로 얻을 수 있다는 이념은 종교의 타락을 가져다 주었다. 행위 또는 공적에 의한 구원 개념 속에는 거래의 개념이 숨어 있다. 내가 한 것만큼 받겠다는 생각이 공로주의적 구원관이 깔려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성경은 루터에게서 중세교황을 대신할 수 있는 권위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성경이야말로 진리의 타당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성경이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신칭의’를 통한 믿음에 의한 칭의가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루터는 믿는 자들은 의로우며 동시에 죄인이라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서와 인간 앞에서 관찰될 수 있는 전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신학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소망 가운데서는 의롭다. 루터는 근본적으로 의에 대한 인간의 개념과 하나님의 개념이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루터는 의에 대한 인간의 개념들에서 하나님의 의에 상응하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는 믿음이며, 믿음만이 이러한 의를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루터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으며,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주장했다. 이는 가톨릭의 ‘행위의 의’에 대한 비판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는 수동적 의로 나타난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하나님의 부재와 고난을 경험하는 삶을 말한다.
‘칭의 교리’는 종교개혁 화두이며, 종교개혁은 바울 문헌의 재발견이다. ‘이신칭의’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수도원 성직자 이행칭의와 쌍벽을 이룬다. 믿음과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이며, 성화와 선행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문제를 다룬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칭의론은 율법의 정죄에서 복음의 칭의로 의에 대한 노력을 다룬다. 기독교신자들은 의롭게 되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갈 3:11-12, 합 2:4, 레 18:5),
십자가 신학의 영성은 오로지 말씀만 붙들려는 의지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과 반대하여 자신(구원)을 실현하려는 공로주의의 토대를 부정한다. 인간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구원을 받는다.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내면을 강화하는 신학이지만, 중세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광을 강조하는 자연신학으로 세상의 조화를 강조한다. 중세 신학에서는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는 하나님을 통해서 피조물을 안다는 인식으로 바뀌게 됐다.
다. 두 왕국이론
한국국민들은 ‘정치신학’을 신학이론서부터 먼저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됐다. ‘로마서 13장’에 대한 신앙 이해가 바로 ‘정치신학’의 근본일 것이다. 로마서 13장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연관해서 설명해야 한다. 바울 시대에 교회는 ‘유대 기독교인’과 ‘비유대기독교인’(헬라 기독교인)이 연합돼 있었다. 교회 밖은 당연히 헬라 인본주의가 장악하고 있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을 통해서 교회와 세상이 구분되면서, 세상의 영역을 삼위일체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로마서 13장은 성경 전체와 연관속에서 해결돼야 한다.
성경 본문이 쓰여지는 ‘바울 시대’는 권위주의 사회 속에서 교회의 생존이 필요했다. 바울 시대는 권위주의 정권과 구분하는 교회의 생존이 우선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에 ‘로마서 13장’은 로마 가톨릭의 지배로부터 분리하며, 동시에 종교적 광신으로부터 분리하는 게 필요했다. 이는 대승불교 차원의 ‘중도’가 아니다. 道敎적 개방성을 허락하는 차원으로 극단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이신칭의’로부터 일탈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는 신앙의 일탈을 극복하자는 이야기다.
칼 바르트는 젊은 시절에 성서가 기초하는 약자를 위한 움직임을 높이사는 ‘종교사회주의’추종자였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 시대를 겪고 나서 소련 볼셰비즘 문화의 한계를 알게 됐다. 볼셰비즘에는 민중의 억울함을 들어준다면서 권력을 변동시키고는, 과거와 동일한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칼 바르트는 자본주의 속에서 준법하며 사는 부르주아 인간관보다 볼셰비즘 인간관을 더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히틀러 파시즘을 이교적이며 사탄적인 권력으로 부정했다. 칼 바르트는 고백교회 운동을 통해서, 성서가 기초하는 독일 시민사회의 복원을 추구한 것이다.
군사정권 때 ‘로마서 13장’은 두 갈래로 나누어서 사고해야 한다. 군사정권에 옹호했던 보수교회 성향의 성도들은 단 한번도 ‘시민사회’를 겪지 못했다. 바울 시대의 ‘권위주의 사회’의 성경관을 그대로 이어서 쓰는 관점이 존재했다. 동시에,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측에서는 서구의 ‘정치신학’관점으로 해석한 로마서 13장이 논해졌다. 그러나, 군사정권 저항하는 대중들은 서구의 정치신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민중 속에서의 이해는 기독교신앙을 사실상 내려놓고 ‘신종교 민란신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2018년 남북연합 국면에서 있어서 ‘로마서 13장’은 다시 해석돼야 한다. 남북연합은 1920년대의 조선공산당 운동당시에, 샤머니즘 종족신 문화를 통한 도교군주론에 민족해방통일전선(유교 두레주의)을 구현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화가 빚어질 결론은 反개신교에 反우파로 흐르게 될 것이다. 당장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순차적으로 일을 진행하겠다는 차원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정치가 하나님께 위임받은 영역(단 4:25)을 초과하도록 하기위하여, 민심을 조작해서 얻어낸 ‘가짜 동의’를 유발하는 시스템 조작에 ‘신앙의 자유’란 이름으로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동시에 연방제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의 보호일 수 있다.
도시/시민, 법/정의는 그 자체로 종교적 개념이다. 시민 구성원을 차별없이 대하는 法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윤리 문화가 존속해야 한다. ‘롤정미’와 ‘강1원’의 1987년 이후에 가장 청렴했던 박근혜 대통령 문제를, 민주화 이후 그다지 깨끗하지 못했던 minjoowha 대통령과 구분해서 재판했다. minjoowha영역이 꾸준히 씨족혈연신앙을 세상에 퍼뜨리며, 민주화영역의 독단적 우월화를 대중에 반복각인시키며 의식을 일차원화 시켰기에 가능한 것이다.
minjoowha 정치는 국가주의를 偶像이라고 규정했으나, 그들은 다른 의미의 ‘지도자 우상화’를 만들었다. 정치척 우상화는 정치적 소외와 동일하다. 지도자 우상화는 아주 쉽게 책임을 떠넘기는 상태로 존속한다. 法앞에 평등이란 문제가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다.
신앙이란 기독교적 실존과 신학적 실존을 구축하는 특수 사건이다. 하나님 말씀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세상을 위한 말씀이요, 교회공동체를 위한 말씀이요, 자신을 위한 말씀이요, 구속의 말씀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유를 확보했다. 이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거듭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신앙은 세상과 세상공동체의 주님이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 받았고 이 하나님 말씀을 전해받은 인간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군림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단언컨대, 기독교의 정치신학은 유교 내성외왕 선비놀이가 아니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신학은 교회공동체에게 오직 성경 말씀에의 구속만을 생각나게 해야 하며, 모든 다른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권장해야 한다. (남북연합국면을 유교 군주나 도교 군주로 상정하고, 무엇을 어찌할래 하는 그런 구속을 기독교인이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런 세상성이 하나님 말씀에 맞는가 안 맞는가가 우선이 돼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거부해야 한다)
두 왕국이론은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개인적 경건과 사회적 책임성이 그리스도 신앙를 중심으로 역동적 통합을 이룬다. 두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통치를 받고 있으나 구분됐다. 루터는 ‘국가’를 세상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기독교인에게 무정부주의자의 인식 자리는 없다. 무정부주의자라는 기독교인은 모두 가짜 신앙이다.)
1520-1525년 사이에,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두 가지 결정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가톨릭 교회에 충성하는 황제 및 작센 통치자들의 노골적인 정치적 억압이었고, 다른 하나는 루터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가 맹아적 형태의 사회종교적 유토피아주의를 수용하여 정치적 지평에서 볼 때 종교개혁을 지배 계층 전반이 수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위협이 그것이다. 두 왕국이론은 이 같은 위협에 대응논리로서 형성되고 성장하였다. 두 왕국이론은 루터에 있어서 ‘칭의론’의 확장이다.
루터는 ‘계시된 하나님’과 ‘은폐된 하나님’, ‘계시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과 ‘계시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을 구분한다. 그리고, ㉠ 세상의 왕국에 대응하는 의로 시민적 의 ㉡ 사탄의 왕국에 대응하는 의로 자기 의(자기 자신의 의에 도취) ㉢ 영적 왕국에 대응하는 의를 구분한다. 루터는 평신도와 사제, 그리고 제후와 주교들 모두가 참된 사제, 주교 및 교황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리스도교적 신분이라고 주장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두 영역 즉 종교사와 세속사의 영역은 상호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면서도 두 개의 서로 구분되는 자율적 영역들이었다. 영적 정부(권력)과 세속적 정부(권력)은 상호협력적이다. 그리고, 자연적 이성은 세상의 왕국, 교만한 이성은 사탄의 왕국, 중생한 이성은 영적 왕국에 대응한다. 게르만 부족들은 그리스도교화 이전에 믿던 종교에서 부족의 우두머리가 종교와 세상 모두를 통치하기도 했다. 만인제사장(그리스도인이 교회/사회 역사) 관점에서, 루터는 교회와 세상이 하나님 통치안에 있다고 본다. 두 왕국 이론은 참된 그리스도교로서 어떻게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의 능동적 시민이 될 수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제시해 왔다.
교황은 세속적 권력으로 독일 사회에 나타나는데, 세속적 권력이 주제 넘게 양심과 신앙을 주관하는 것이다. ㉠ 세속의 법과 칼이 세상의 시초부터 존재하고, ㉡ 세속권력이 너무 확장되어 하나님 나라와 통치를 침식하지 않도록 ㉢ 제후 역시 그리스도처럼 내 직분으로 말미암아 신민들의 유익과 이익을 가질 수 있도록 나타난다. 루터의 두 왕국설은 진리 자체에서 하나님과 황제 사이의 비판적, 논란적 분열을 초래한다. 그것은 政敎合一主義도 성직자의 신정국가도 허락하지 않는다. 김대중은 천주교의 교적이 있는 천도교인이다. 천도교는 교정쌍전이라 하여 성리학의 정교일치를 계승한다. 노무현도 현재의 좌파 정부 지도자도, 일제 식민지시대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조선공산당과 농민을 연계하는데 사용됐던 농민신앙이 신앙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신종교 무당신앙’이자 기독교 자체가 아닌 것을 기독교로 오독했다. 좌파정부가 추구하는 통일정책에는 히틀러 파시즘의 독일 민중의 광신을 초래하는 상징과 정치적 기능한 비슷하지만, 종교적 형식은 다른 표현들이 대거 등장한다. 히틀러 파시즘은 독일 민중의 광신을 끌어낼 때 기독교 상징을 사용했지만, 좌파정부의 신종교 무당신앙에서는 도교 상징이 대량 투하된다. (히틀러 사회를 반대한 자부심으로 사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부 독일 신학자들의 한국 사회의 파시즘 사회화 지원을 해서 ‘살림’이 많이 나아지셨는지?) 무당신앙의 ‘맺힘’과 ‘풀림’의 이분법을 설정하고, 원망 섞인 현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민중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유도한다.
또한 세상과 정치는 숭배되어서도 안되지만 종교적으로 탄압되어서도 안된다고 가르친다. 더도 덜도 아니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해가는 세상을 본연의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며, 하나님을 본래의 하나님으로 존재케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네 지배자들을 미치게 하였다. 이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신민들에게 무엇이든 자신들을 따르라고 명령한다. 또한 신민들도 통치자들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이 같은 일이 너무나 당연시 되어서, 통치자들이 어떤 책은 없애 버리거나, 자신들의 명령을 마치 하나님의 진리나 되는 것처럼, 무엇이든 믿고 따르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교만하게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 놓고, 사람들의 양심과 믿음 위에 군림하며, 자신들의 왜곡된 생각에 따라 성령을 가르치고 있다. (S. 오스맹, 박은구 역, 『프로테스탄티즘 혁명의 태동』, 혜안, 2994. 255쪽)
종교개혁에 대한 정치적 억압을 막는 것이 두 왕국 교리를 제시한 하나의 동기였다면, 그것의 지지자 및 동료 추종자들의 열광주의와 이상주의로부터 종교개혁을 구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동기였다. 영주나 제후 못지 않게 일반 평신도 역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주의적 자유를 남용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개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종교사와 세속사를 동일한 영역의 것들로 보는 한, 사회에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려는 시도들로 인해서 혼돈이 있을 뿐이었다. 정부에도 권한이 한계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이상도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자리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다. 루터는 구원은 전적인 선물이며, 행함과 공로를 전적으로 배격한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보았다.(엡 2:8-9, 롬 1:17, 5:1, 갈 3:11, 히 10:38)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의롭다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음을 믿는 데서 얻어질 수 있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믿는다는 것과 연결된다.
종교개혁 관점이 잘 드러나는 곳은 두 왕국설인데, 개인의 내면 강화 (하나님 나라: 인간 내면의 하나님 나라/세상나라-국가)로 나타난다. 루터가 말한 신학적 정의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칭의다. 종교개혁은 근대사회는 개인의 내면을 강화했다. 근대 계몽주의가 인본주의로 기독교초월을 없애는 관점이었다 하더라도, 종교개혁이 만든 개인의 내면을 강화하는 이념은 그대로 존재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영혼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의 영적 통치는 ‘말씀’, ‘성령’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속통치는 ‘왕’, ‘제후’, ‘행정자’를 통해 작동한다. 루터는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부정했다. 그는 형이상학적 신은 원리나 원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며, 출애굽시키신 하나님이다. 이 살아계신 인격적 하나님은 고난의 삶 한가운데서 하나님이다. 예수도 원칙이나 원리로서 인격이 없는 신이 아니라 인격적 아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주장한다. 인간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구속의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러므로 삶의 진정한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루터는 신앙에 결합된 교화된 이성은 인정했다. 그는 하나님이 교회와 세상을 모두 통치하되, 하나님 주권이 우선하는 관점과 연결된다.
1) 국가권위의 기원은 하나님 : 국가의 권위가 하나님에 의해 국가에 위임되었다는 사실, 따라서 본래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결코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경배는 하나님 한분께만, 그리고 모든 정사와 권세의 주이시며?(엡 1:21-22) “땅의 임금들의 머리”(계 1:5, 참조 19:16)이신 그리스도께만 돌려져야 한다.
2) 하나님이 국가에 권위를 주신 목적은 선을 보상하고 악을 처벌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분명 선한 정부가 주는 모든 사회적 유익, 곧 평화를 수호하는 것,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 인권을 보호하는 것, 정의를 증진하고 궁핍한 자를 돌보는 것을 포함한다.
3) 국가의 폭력 사용은 그것이 주어진 특별한 목적에만 엄격히 제한되는데,경찰국가가 억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합리화해주는 구실을 찾을 수 없다.
4) 국가의 권위에 대한 올바른 승인을 해야 한다. 국가의 권위와 사역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국가에의 봉사를 피해야 할 이유를 전혀 발견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권위는 하나님에 의해 국가에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국가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되는 바로 그 시점까지 국가에 복종해야 한다. 전체주의적 통치에는 비판하며 저항해야. 국가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명한다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다. 시민불복종은 구약에서는 다니엘과 친구들이 보여주었고, 신약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보여주었다. 특별히 존중한 성경적 개념이다.(출 1:15-21, 단 3:1-18, 6:1-14, 행 4:13-20) 법률들이 하나님 율법에 반대되어 제정될 때마다 저항이 의무가 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자들의 공동체다. 성서적 가치를 통해서 인간의 교만과 죄를 통제한다. 성서를 통해서 만인제사장으로서 믿음을 가지는 기독교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정치적 질서가 존재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국가에 위탁하신 영역에 대해 분명 인정하고 이를 존중하고 위탁해야 하며, 국가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도록 유도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두 왕국론이 강조된다. 개인의 내면은 국가법으로 강제할 수 없는 자유로운 곳임과,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국가나 정당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행할 수 있도록 주장한다.
‘의(하나님 백성이 되는 길)’와 ‘믿음(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은 연결돼 있다. 사회적 유대관계로서 믿음과, 믿음의 삶으로서 의로움이 연결돼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저주는 연대의 공동체다. 비 유대교와 유대교 기독교는 화해 연대다. 루터의 관심은 잘못된 권위에 복종하는 전근대적 인간의 삶 양식 벗기를 말한다. 바른 삶이 동반되는 믿음의 요청을 말하기도 한다.
십자가는 진정한 신학이 우리의 부적절하고 오도하는 편견들과 가정들의 자리에 출현할 수 있도록 우리의 가지고 있는 이러한 편견들과 가정들을 부숴버린다. 신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시작한다. 신학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시작한 뒤, 십자가를 그것이 미리 결정한 범주들 안으로 동화시키지 않는다. 반면에, ‘영광의 신학’은 합리적인 것(인간정신이 처리할 수 있는 것)을 우선시하면서 진행된다. 영광의 신학은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는 반면, 십자가 신학은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십자가 신학은 경험되어진 것에 우선권을 준다. 십자가 신학은 지적 사변으로 혹은 사물들을 인지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 여기는 모든 개념에 저항한다.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내면을 강화하는 신학이다. 루터에 의하면 진정한 신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주시함으로써 시작된다. 우리 안에서 우리에 대해 계시는 하나님을 논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충성하고 순종한다.
중세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광을 논한다. 영광의 신학은 자연신학을 다룬다. 세상이 얼마나 조화로운가?와 자연질서를 통해 하나님 영광을 논한다.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알아야 피조물을 알 수 있다.
라. 독일 파시즘
한국 정치가 파시즘 사회로 빠지기 쉬운 토대에 있다는 것은, 한국 정치와 독일 정치가 후진적인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에 있다. 독일의 ‘부르주아’와 ‘소 부르주아’는 궁중의 삶에 연결돼 있었다. 조선후기에 사색 朋黨의 귀족독재 시대는, 귀족의 정파들이 국가를 장악하여 국가를 도구로 자신의 이익을 넓히는 차원에 있다. 민중신학 세력은 反共이 反유대주의라고 주장했다. 히틀러 파시즘 사회의 게르만 민족의 유대인에 대한 관직 싸움이 핍박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反共은 6.25 때 빨치산과 인민군들의 국민 학살에 대한 공포에 기원이 있다.
1988년에 발표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KNCC선언)은 反共을 회개한다고 선언했다. 反共혈족만의 국가를 구성한다고 하며, 이상적 국가는 공산세력을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우르다’는 신앙의 신앙적 대상은 샤머니즘 종교의 ‘자연 神’이며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예배하는 종교는 단언컨대, 기독교가 아니다!! 그 이후 30년이 지나서 보니, 민중신학 세력들이 좌익 씨족만의 국가를 구성하려 한다는 의미에서(그런 이유로 ‘적폐청산’ 과 좌익만의 한국사서술을 시도) 그들을 후원했던 ‘몰트만’을 포함한 독일교회와 미국 북장로교회에 회개를 요구하는게 상당히 적법한 상황에 처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로마서’의 토양에는 혁명적인 사람이 서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로마서’는 한국 국민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루며 살아온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혁명적인 사람들을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볼셰비즘 안에서 의기양양한 인간의 종말을 논한다.(롬 12:21) 천도교는 민란신앙이다. 조선후기 귀족독재 사회가 엿 같다며 사회를 뒤집어 엎기 위한 것이다. 일제식민지 시대와 더불어 민주화운동에 기초는 기독교가 아니라 천도교 등의 신종교였음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그렇게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조선후기’의 노론독재를 빼다 박았다. 노론독재의 종말이 ‘일본’에 나라를 파는 것이다. 그런 상황으로 돌입하지 않기 위해서, 애국기독교인들의 결사투쟁이 필요하다.
민중들의 현실 사회의 불만을 이용하여 사회를 전복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렇게 차지한 권력은 몇 달 안에 정당성을 잃고 붕괴된다. 다시금, 몇 달 만에 새로운 惡으로 등장하게 한다. 참된 혁명은 이러한 혁명을 단념하는데 있다. (롬 13:1) 기존 질서를 ‘사실 그 자체’로 환상 없이 인정하는 것, 그것 보다 힘차게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일이 없다.
참된 혁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롬 13:2) 선한 질서가 행해질 때, 세상적 권력에 억압적 의미는 사라진다. 선한 질서는 하나님 신앙에 기초한다. (롬 13:3)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만 의롭다,(롬 13:4) 한국 사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근원인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를 회복시키는 양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롬 13:5)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힘을 확인할 때, 모든 것은 전복된다. (롬 13:8) 불편한 진실이지만 한국 정치의 이분법적 논리의 모든 기원은, 조선후기 귀족들의 감투 쟁탈전와 연결된 마을 연고주의에 있다.
독일파시즘의 기본적 힘은 신화적 성격에 있다. 독일 파시즘에 사용된 신화는 이미지 총체로서 감정을 촉발하는 직관을 끌어내며,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신화는 민족숭배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대중들이 신화에 젖어들게 되면 옳고 그름 판단을 벗어나게 된다. 파시즘 사회에서는 파시즘 외에 다른 정치적, 도덕적 의식을 갖게 된 기회가 애초부터 박탈된다.
『나의 투쟁』의 ‘전쟁 선동’장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배웠던 것을 수감생활이라는 강요된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규칙적으로 정리했다.
<모든 유의 선전은 대중적이어야 하며, 정신적 수준을 대중들이 제대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제한된 것으로 잡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수준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것을 이해하는 대중의 수는 많아진다. 대중의 수용능력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이해력의 범위는 좁고, 이해한 것도 아주 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효과있는 선전은 단지 몇가지 점으로 제한해야 하며, 연설중 최후의 특정한 말은 원하는 것을 상상하게 해줄 정도로만 길게 구호를 외치듯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기본원칙을 단념하고 광범위하게 사용한다면, 대중들은 제공된 내용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기억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 효과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민족은 절대다수가 냉정하고 깊은 사려보다는 느낌에 의지한 감정이 사고와 행동을 규정할 정도로 여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며 제한되어 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세분화된 감정이 아니라, 긍정 혹은 부정, 사랑 혹은 미움, 정의 혹은 불의, 진실 혹은 거짓등의 감정만 존재한다. 그 중간 단계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랄트 슈테판, 최경은 역, 『아돌프 히틀러』, 한길사, 1997. 89쪽)
독일파시즘의 중심 대상은 하층중산층이다. 독일 파시즘은 신, 운명, 섭리등의 주장으로 하층 중산층의 무한한 자기 도취를 추구했다. 파시즘 사회의 대중도취는 일체성과 완결성을 갖는다. 독일 파시즘의 피의 대지와 하나로 되는 운명 공동체가 나타났다. 나치즘의 원리는 극단적 기회주의를 보여주었다. 나치즘 사회는 권력획득을 위한 사회적 뇌물 공여로 대중들의 수동적 순응을 만들어냈다. 독일 하층 중산층의 원자화. 무력화.는 새로운 영웅을 갈망하는 대중의 심리정상성을 향한 갈망을 만들어냈다. 독일 대중사회의 삶을 위한 충동은 파괴를 향한 충동과 연결됐다. 독일 파시즘 대중의 억제되지 않은 욕망은, 권위없는 공공성과 자아 마비 파멸상태로 연결됐다. 독일 교회에서 자유주의 신앙은 이러한 파시즘 선전선동에 무기력한 상황을 만들었다.
파시즘운동가들은 사회민주당의 신문을 유대인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볼 때 독일 사회의 주도층은 한결같이 선택된 민족에 속하고 있던 것이다. (반공이 反 유대주의 아니다는 분명한 설명 필요) 나치의 反유대주의는 유대인을 뿌리 뽑아야 할 악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히틀러 독일 파시즘 사회는 아리안 민족이라는 틀안에서 사회가 형성되며, 유대인의 절멸자체가 목적이었다. 파시즘은 국가, 민족공동체, 지도자 신성화, 절대악인 유대인과 인종투쟁으로 나타났다. 독일은 아리안주의를 바탕으로 독일민족만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독일 사회는 부르주아 계급과 소 부르주아 계급은 궁정에 경제적으로 의존적이었다. 나치세력들은 유대인세력의 직장들을 빼앗아 나눠주는데 치중했다.
지도자 숭배라는 명목으로 대중을 능욕했다. 히틀러란 이름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자리를 대신했다. 나치즘은 명백히 자연의 신성화였다. 히틀러 자신이 反기독교적이었다. 독일 파시즘은 ‘에다’와 ‘오딘,’ ‘토르’ 같은 독일 민족신화를 이용하여 기독교교리를 파괴했다. 히틀러 시대의 모든 기관이 기독교 박해의 혈안이 됐다.
(한국의 민중신학 정치집단이 지배하는 좌파정부의 파시즘 성격에 대한 우파 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한국 민중신학 세력의 파시즘정치는 『정감록』 정도령 믿음과, 아기장수 설화라는 민간의 신화를 기독교 신앙에 포함시켜 기독교를 파괴했다. 그들은 기독교기구에 포함돼 있으나, 그들의 모든 정책 설정은 反기독교로 설정돼 있다. 그것을 한국 현실에 매우 부적절한 서구 기독교 문화를 보수교회를 파괴하려는 ‘도구’적 가치으로 수입하는 방향으로 추진했다. 反共성향의 보수기독교를 국제 고립된 세력으로 만들거나, 기독교가 파괴되는 것을 즐기거나 하는 것을 추구했다. 한국 민중신학 정치집단이 추구하는 ‘토착화신학’의 핵심 교리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참나’를 끌어오는 ‘마음’의 철학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철학적 토대는 기독교경전이 아니라 『中庸』이다. 中庸이 거론하는 중국 神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마. 자연신학, 자연법
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 서양의 자연인식은 ‘주객분리’이며, 동양은 ‘주객일치’라서 동양이 긍정적이란 이야기는 많이 퍼졌다. 그러나, 서양의 입장에서 보면 서양이 합리적이고 동양은 합리성 결여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동양의 자연이든 서양의 자연이든, <하나님 계시>를 가리는 것은 명백하다. 신학적 관점의 차이에 따라서 하나님 계시를 가리지 않는 선에서 어디까지 인정하느냐의 관점은 달라질 수 있다. 동양의 샤머니즘 자연신학에서는 ‘씨족 보전’을 위한 사회적 진실 결여가 권장된다. 종족 보존이 절대명제가 되기 때문이다. 孟子나 老子나 莊子에서 정치적 쿠데타를 두고 민중과 귀족의 대응양상을 다루는 서술을 보면, 심각한 절망을 느끼게 된다. ‘자기’와 ‘직계 가문’ 이외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것만을 인정하는 결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귀족들이 서로가 서로간에 권력 강화를 위해서, 서로 爭鬪를 벌일 때 사회의 안전시스템은 붕괴된다. 귀족 상호간에 신뢰와 보편이성이 결여된 집단 과두정체제는 반드시 사회적 충돌로 나타나고, 필연적으로 사회제도적 작동이 흔들리는 정부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조에서 독재 정치로 빠지는 것은 상당히 논리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유럽 사회주의를 기초하는 동방기독교영성을 높이 사면서, 서방교회가 자본주의 영성이며 ‘구조惡’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교회 공동체의 공동체적 기독교 신앙이 그렇다면 그러한 신앙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정치인이 의도적으로 유발한 ‘저신뢰 가족주의’사회의 원자화된 구조가 동방기독교의 플라톤적 영성이라고 <국제 신앙 뻥치기>를 시도했다. 중국문명권에서 귀족은 귀족대로 민중은 민중대로 자기 혈연과 직계만 신경 쓰는 사회에서, 군주의 지배력이 붕괴되면 원자화된 무질서 사회로 바뀐다. 이러한 구조는 단 하나의 안정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사람들은 생존을 걱정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을 거의 붕괴지경으로 끌어내린 연후에, 서양유럽 민중문화의 내재적 합리성으로 사회가 움직이는 것(본 회퍼 후기의 ‘死神신학’ 같은)은 한국 국민에겐 불가능하다. 유럽의 로마문명이나 비잔틴 로마문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게 동북아 사회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교회협의회는 자신들이 싫어하는 구조 惡보다 훨씬 더 몇 백배 악마적인 구조악을 한국사회에 심은 것이다.
친북좌파 기독교의 反국가안보 행사에서는 언제나 ‘본 회퍼’가 논의된다. 자본주의 형성 이전의 유럽사회의 국가를 넘나드는 공동체 사회를 이루는 민중문화와, 그 속에서의 기독교문제가 깔려 있다. 한국 국민에 그런 게 어딨나? 한국어를 바로 英譯하면 표현이 이상할 수 있다. 주체사상 공산당은 東 獨 공산당처럼 서독과 루터를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고, 성리학을 기초로 건설된 주체사상 공산당은 남한 사회에 깔린 천도교문화와 공동점이 있을 뿐이다. 주체사상 공산당은 언제나 남한의 對북한 국방력의 무장해제를 주장하지만, 주체사상 공산당의 전투력 무장을 해제하지 않는다. 유럽의 어중이떠중이 똘마니들은 방송에 비춰진 것만을 맹신한다. 마찬가지로, 유럽 로마문명에서 작동하면서 한국 사회에 바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이 있다. 유럽의 세상적 인간을 다룬 부분에선 특히 그러하다. 대한민국의 국방을 붕괴시켜서 평화가 온다는 생각은, 북한공산당이 유럽사람이며 남한 국민도 유럽사람이라는 전제에서만 팩트다. 유럽의 지식인들, 유럽의 어중이떠중이들, 한국 대학생들, 한국 어중이떠중이 똘마니들은 이런 논리에 많이 속는다. 그러나, 한국이 유럽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 다른 상태로 그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국 우익 국민들에게 과거에 좌파 민중신학이 인문사회학 계몽을 했던 그런 요소가 필요하다. 국민주권주의를 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도자 우상숭배를 권장하며, 지도자에게 모든 판단을 맡기도록 유도하고 지도자는 맘대로 판단하는 것은 정상적 국민주권주의 이행은 아니다
자연신학은 객관적이고 보편 다양한 일반적 계시를 나타낸다. 인간은 자연세계로부터 지각하고 배울 수 있다. 자연신학은 인간정신의 질서가 우주의 질서와 같다고 보며, 인간 이성을 통해 하나님 인식을 생각한다. 물리적 우주는 신적 속성을 공유한다. 지성의 자연화 전략으로서, 지성이 자연화됨으로써 신성은 우주 안에 내재화되고 가시화된다. 스토아아학파는 세계를 살아있고 이성적 존재로 인식한다.
자연법은 선천적으로 인간에 주어진 의로운 행위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도덕적 제일원리의 명제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자기 보존의 법칙으로부터 나오는 자연법의 유용함을 말한다. 자연법으로서 자연권은 고대로까지 소급하는 자연법에 근거. 근대적 개념의 인권은 개인의 실천이성에서 구성된다. 서구에 있어서 스토아학파의 자연법은 어떤 선행법률보다 이상적인 내재적인 법이다.
동아시아에서 중세에 있어서 자연법으로 신분제를 유지한 문화로는 예악사상이 주목된다. 예악사상 안에서 중국문명 신분질서가 구축됐다. 예악사상은 중국 사회의 정착문명에서 과거부터 이어지는 군주 중심의 씨족문화를 말한다.
天은 인사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맹자의 天은 자신의 性으로 들어와 德으로 내재하는 천인합일로서의 天을 말한다. 중국 문명에서 나와 자연과 우주는 하나로 연결된다. 天은 유기적 관점에서 하나 연결되고, 禮는 반드시 樂과 함께 보조로 사용된다. 중국문화에서 自然은 씨족 정착사회를 이루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존속했다는 문화를 담고 있다.
탕평은 極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다. 탕평되지 않는 사회의 일상인 편당문화는 곧 사적인 이익 추구로 사용된다. 중심을 바로 세워야, 넓고 공정하며 공평하게 균형을 세울 수 있다고 중국 유교문명은 믿는다. 중국문명은 씨족사회로, 씨족 마다 서로 소통되지 않는 다양한 기준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맺어줄 바른 군주가 있을 때에만 국가의 소통성은 원활해진다.
양반귀족은 붕당을 이루어 관직을 차지하려 노력하였다. 조선왕조의 붕당에 있어서, 학파가 정치적 당파였고, 곧 정파였다. 관직과 붕당은 깊이 연결됐다. 당파간의 분열이 지속됐고, 붕당은 사림정치에서 파생한 부산물에 불과했다. 지역성은 한국친족조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엘리트의 관직 차지에 있어서도 지역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엘리트 관직 차지에 있어서도 ‘친족 조직’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양반 귀족이 관직을 차지하면, 그들은 관직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후원세력을 만들었다. 양반귀족은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마피아 서열주의를 만들기 쉬웠다. 가까운 사람을 높이고(親親), 현자를 드러내고(賢現), 존귀한 분을 존대하며(尊尊), 연장자를 우선하는(長長) 등의 유교 윤리에 입각한 조직윤리를 유지하였다.
양반들의 조직법과 구조적으로는 매우 유사하지만, 세속화된 버전이 巫敎를 통해서 형성하는 친족주의 세계관이다. 巫敎의 사상체계는 현세적, 물질적, 현재적인 가치체계로, 자연의 순환질서에 따른 가족 내지 부락공동체의 구복을 위한 현세중심적 가치관을 드러낸다. 무교는 인간관계에 대한 관심이 결여가 됐다. 무교에 있어서 횡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은 없다. 현실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가치를 갖는다. 한국 무교는 종교혼합적 성격을 갖는다. 이는 기복신앙과 연결된다.
교회에서는 무교에서 추구하는 신앙과는 다른, 하나님에 대해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유교와 무교가 구조적으로 유사하지만 무교가 세속적이면, 귀족부터 일반인을 아우르는 관점으로 무교를 기반으로 종교혼합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창조된 20세기 新종교가 천도교다. 천도교에서 侍天主 교리는 各自爲心을 통해서 자기중심적 배타적 욕망을 비판한다. 이는 유교 제사양식에서 私 를 부정하는 것과 연결된다. 유교가 군주신앙을 통한 조화를 가지고 있지만, 천도교는 한울神을 통한 巫敎적 조화를 다룬다. 천도교는 사람 마음에 天(한울)을 품고 있다고 본다.
영웅은 샤먼으로서 죽은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신앙에서 생겼다. 이는 무당의 굿신앙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씨족영웅의 탄생은 입사제의를 통하여 형성되며 신화로 정착된다. 신라의 건국 신화는 왕권신화로서 시조왕제사를 통해서 나타난다. 정치신화는 집단의 우월성과 단결력 강화와 선례에 따른 전통의 수립과 유지의 기능이다. 영웅신화는 시조신화와 건국신화로서 한중 역사의 시원 문제와 직결된다. 영웅된 자, 선택된 자, 부름받은 자만이 하계를 방문하고 귀환한다. ‘출발’하고 ‘입문’하고 ‘귀환’하는 절차로 나타난다. 영웅신화는 신분사회제 속의 노비계급의 의식의 물상화를 반영한다. 민족신화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런 신화를 활용하게 되면 자유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자라날 수 없다.
정치적 십자가 신학은 이 전선에서 정치적 우상숭배와 인간의 정치적 금치산과 소외에 대한 해방의 비판세력이 된다. 그러므로 슐라터는 “예수의 소명과 과업은 그가 우리의 우상을 파괴하는데 있었고, 그가 우리의 거짓 신격을 폐기하는 무기는 십자가”였다고 확언했다.
정치만큼 우상숭배와 소외 증후에 지배되는 삶의 영역은 없으므로 여기에 우리는 어떻게 이 해방이 행해지는지를 예의주시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이를 수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명제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 구약성서적 형상금지는 그의 필연적인 귀결에서 폰 라드가 제시한 바대로 단지 존재주의로부터 해방된 한 새로운 세계이해만이 아니라 우상숭배로부터 정치적 삶의 해방도 각인한다. 성서에서 우상숭배라고 비난되는 것이 현대와서는 인간의 소외와 금치산에 대한 비판에서 다시금 나타난다.
㉡ 십자가 신학은 구약 성서적 형상금지의 철저한 실행이다. 요컨대 그것은 a. 비 신호화를 통한 신화적 신학에서와 b. 인간 내외의 신적 자연의 세속화를 통한 자연신학에서와 c. 지배관계의 근본적인 민주화를 통한 정치신학에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종말론적 자유의 시발을 특징 지운다.
유대인의 알레이누-기도에 의하면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메시아적 미래란 “네가 만약 땅에서 모든 우상을 내쫓고 거짓신들이 완전하게 멸절되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제2계명에 의하면 우상숭배, 미신, 우상화, 주물 숭배, 인간 숭배 등은, 인간이 보이지는 않으나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들로 만들고 그들 자신이 만든 그것으로부터 확인되고 보호받기 위해 자신을 예속시키는 행위에서 비롯된다.
폰 라드가 밝힌 바와 같이 동양적 우상종교의 우상들이란 단순히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장소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가능성에 의해 신의 내재성, 신의 투과성으로서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가 될 수 있다는 우주 독신적 세계 이해에 기인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만들지 말라는 엄금은 자연세계를 신에게서 인간의 책임으로 옮기고 자연 환경의 제신 예배 장소, 시기와 그 형상들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2계명이야말로 세상보다 우월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성을 보호하고 고무하는 것이 아닌가? (J. 몰트만, 조성로 역, 『정치신학/정치윤리』, 대한기독교서회, 1992. 70-71쪽)
‘신화’는 욕망의 투사로 나타난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민중은 신분제가 없는 세상을 그렸다. 그러한 욕망이 조선후기 문학양식과 구비문학에 투영돼 왔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기를 소망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無정부 사회주의 전통의 수입을 통해서 확대됐다.
일본 아나키즘은 ‘이에’(家)와 ‘무라’(村) 전통을 기반된 老子적으로 해석된 가치와, 러시아 아나키즘과, 천황 이데올로기가 겹쳐진다. 일본 아나키즘은 고도쿠 슈스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일본 아나키즘은 중국 무정부주의로 확대된다. 일본과 중국 아나키즘의 수입은 민족해방(NL) 진영의 진정한 조상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龍과 龍의 대격전』에서 나타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이 소설에서 ‘드래곤’은 上帝의 천국을 파괴한다. 上帝는 기성의 제도·정치·법률·도덕·종교의 의인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을 부정한다. 道家를 추구하는 지도자와 그 씨족 연계집단의 자생적 상태로 머문다. 『조선민족혁명선언』을 통해서, 단재 선생은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결합한다. 이를 통해서 단재 신채호 선생과 직계 혈연이 아닌 이들을 모두 부정하는 평가를 드러낸다. 행동하지 않는 모든 씨족의 파괴를 위해서 ‘살인·방화·폭동’등의 모든 방법을 써도 좋다고 하는 생각에는 이런 관점이 깔려 있다. (사회주의 마을의 春秋 義利를 긍정하는 직계 후예는 긍정하나, 혈연관계가 없는 이들에겐 부정평가가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중국 문명권에서 20세기에 있어서 君主를 전제로 작동된 士에 있어서, 君主에 대한 복종의 의미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고토쿠 슈스이는 “애국심이란 국민와 미신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나키즘을 현실적 사회운동으로 해석한다.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의 성격을 띤다. 민중혁명을 통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추구한다.
현실 권력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현실초월의 절대적 욕망의 무정부 사회주의 문화는,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키 혁명을 이해하는 중요한 해석틀이 됐다. 러시아 정교에서 神化개념을 통해서 레닌이 현실참여 동력을 얻었다면, 식민지시대 사회주의자들은 신종교 무당신앙에 있어서 무정부사회주의의 행동주의에서 현실 참여 행동을 얻었다. 무정부 사회주의 운동은 정당한 국가기능에 관심이 없다.
바. 고백교회 운동
칼 바르트는 일반계시와 자연신학 모두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 한다고 보았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참된 지식은, 말씀을 통해서만 온다고 보았다. 참된 지식은 창조자요 화해자요 구속주인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온다고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 연구를 통해 바르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그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교 단체, 사조, 운동이 하던 방식으로 계속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 없이 모든 일이 끝났다. 하나님이 그저 인간이 시작한 일을 추진해 주시고 멋지게 마무리해 주시는 정도로 선하신 분이어야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 아니었다. 그저 얼른 스쳐 지나가면서 그 분의 동의를 낚아채려고 할 뿐이었다. 하나님의 열정이 강해질수록……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에 대한 불복종도 강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거기서 나올 만한 결과도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나 풍성한 도우심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개혁이거나 구태의연한 세계질서를 새롭게 주름잡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것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입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미혹하여 그분의 나라 도래의 필요성을 한동안 느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운동은 하나님을 움직이지 않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요, 우리의 일(대의명분)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것이며, 우리가 맘껏 펼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고요히 커 나가는 것을 방해한다. …… 그러나 우리의 일이 모조리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의 일은 철저하게 그 분의 일이라는 사실이 확연이 드러날 수 없다. 오늘 우리는 그 자리에 서 있다.(에버 하르트 부쉬, 손성현 역, 『20세기 신학의 교부, 시대 위에 우뚝 솟은 신학자, 칼 바르트』, 복있는 사람, 2014. 182-183쪽)
칼 바르트는 자연신학에 반대했다. 창조세계 속에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칼 바르트는 자연 신학에 기반한 자유주의 신학으로는 인간이 이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본다. (필자는 서구의 자연신학에 기초된 자유주의 신학 뿐만 아니라, 계룡산 영성에 기초된 신종교 무당신앙에 타협하는 한국판 자유주의 신학으로도 하나님 인식을 못한다고 본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자기 우상화를 비판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우상을 추구한다.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자칭하다가 항상 단지 우상들만을 찾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강탈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소유욕구의 대상이다. 신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종’이긴 커녕, 인간이 하는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바이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유 추구>의 대상으로 변한다. 그러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사이비 神이다. 우상 숭배 속에서 우상들이 인간을 자신들이 하나님인양 지배한다. 이는 하나님의 物化이며, 인간의 사고와 행동 자체의 物化다.
칼 바르트는 서양 인본주의에 기반된 자유주의 신학에서의 우상화를 비판했다.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된 서양의 자연신학이 하나님에게 소외된 인간의 자기 우상화로 간다는 비판이다. 반면에, 한국교회사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은 서양인본주의와는 다른 의미가 나타났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이라 불리는 것은 계룡산 무당영성을 통해서 성서적 가치를 자의적으로 읽을 자유를 말하는 경향을 말한다. 식민지시기의 한국교회가 민중영역에 복음 전도를 하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토착신앙으로 떨어지는 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한국교회에서 쓰는 ‘자유주의 신앙’의 의미 표현에 담겨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을 서양에서와 같이 ‘철학적 신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 계룡산 무당영성은 샤머니즘 영웅 神이 있다. 그 영웅 神은 각 마을의 소유였다. 마을 마다 민담 설화에서 神적인 것이 소유됐다. 마을 神이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이용돼 주는 소비재였듯이, 한국판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그렇게 적용된다. 토착신앙은 한국인들을 도취하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성서적 의미에서 우상숭배이고 그것을 통한 인간소외(‘무당’만 룰루랄라) 현상으로 나타난다.
칼 바르트는 부르주아적 인간을 보수적 인간의 현재적 형태로 본다. 이는 사회의 생존투쟁을 반영한다. 그리고, 혁명적 인간을 기존질서의 철저한 부정으로 본다. 칼 바르트는 초기에 성서가 증거하는 약자를 위한 하나님 신앙에 기초하여 사회주의에 경도됐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에서 종교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성서적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섰다. 칼 바르트는 혁명적 인간을 보수적 부르주아적 인간보다 악하다고 본다. 혁명가는 그에 속하지 않은 입장을 찬탈한다. 혁명사상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똑같아지려는 기독교신앙적인 교만이 발견된다. 그리고, 칼 바르트는 혁명가의 혁명은 결코 참된 질서를 창조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혁명이 성공하고 난 이후에는 기존 질서와 똑같이 변해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 바르트는 진정하게 혁명적인 것은 하나님의 혁명 뿐이라고 본다.
칼 바르트는 인종적인 국가사회주의 신학이, 성경적 기준점이 없기에 빚어지는 가치 상대주의 문제를 유발한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마을 神으로서 무당신앙이거나 유교 신앙과 종교혼합된 신앙이 ‘가치 상대주의’문제를 야기한다. ‘가치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면, 그것은 대화나 소통이 아니라 각자 말하기 대화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혈연 연고주의에 기반한 <가치 상대주의>가 사실상 존재한다. 그리고, 교회의 연합과 일치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집합적 의지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5)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다, 라는 신앙고백은 교회의 존재다. 믿음의 일치가 없다면 어던 통일성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난 탄핵 정국 때, 한국교회는 ‘탄핵’을 머리로 하는 연합과 일치를 보였다. 결국은 1987년 이후 가장 청렴한 대통령에 어이없는 무거운죄를 씌우고, 탄핵의 빌미가 됐던 증거물은 모두 조작됐고, 탄핵의 주된 근거가 됐던 민심은 김갱수와 드루킹의 매크로 포털 사이트 조작으로 나타났다. 정말 어쩔껀가?) 믿음의 일치는 ‘하나님 통치’의 상관개념이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칭의의 말씀은 교회의 현실을 포함한다.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다. 교회는 말씀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교회는 십자가의 말씀 위에 세워지고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화해되고 의롭다고 인정 받는다. 교회는 목적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다. 교회는 현존하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란 말은 교회 안에 있다란 말과 같다. 그리스도로 인해 교회지체가 서로 함께 있다. 사랑안에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고전 12:12, 롬 12:4, 엡 4:4, 골 3:15) 교회는 세계와 함께 일어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운동과 그 포괄적인 삶의 맥락안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개별교회는 세계와 함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안에서 이해된다. 교회는 피조물을 해방하는 하나님의 영화에 참여하며, 교회는 정치적인 세력의 탈 신성화와 정치적 지배의 민주화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러한 교회연합 신앙의 기초는 성서중심적인 예수부활신앙에 토대를 갖는다. 그러기 위해서, 성서적 교회연합이 이루어지기 위한 토대는 이렇게 볼 수 있다. ㉠ 설교가 그리스도 계시에 부합하나?- 목회자나 특정인사의 자의에 기반된 것은 아닌가? ㉡ 설교가 교회라는 장소에 부합하나? - 예수 신앙을 파괴하기 위한 이용은 아닌가? ㉢ 설교가 신앙고백과 부합하냐? - 설교가 기독교인간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보편적 토대가 없는 자의성은 아닌가? ㉣ 설교자는 말씀에 복종하는 종의 자세가 있는가? - 신자들의 공동체는 설교자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설교자의 자세가 부적절한 경우, 말씀은 퍼지지 않는다. ㉤ 설교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 인정을 받았나 – 설교자 청빙이 귀족층 자의성은 아닌가? ㉥ 설교는 설교자의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성경해석으로 보여주는 선교다. - 유교 지식인처럼 ‘지식’으로 건방 떠는 게 아니다. ㉦ 설교에 사용되는 언어는 진실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 -설교 표절 금지 ㉧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 설교자는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서 자기 앞에 양떼로서 신자들을 책임지는 모습이 필요하다. ㉨ 설교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 설교자는 페이스북 정치먹사 같은 건방 떨기를 하면 안된다.
그리고, 교회연합은 ㉠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 박에 없다는 인식과,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면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신은 이미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인식(세계교회협의회가 칼 바르트가 ‘토착화신학 연구자’에 박사학위를 주었다고 무조건 인정했다면, 칼 바르트 우상화를 통해서 칼 바르트의 뜻을 이어가지 않았다고 보는게 맞다. 세계교회협의회 지도부, ‘너’님들의 罪를 고백하라!!!) 과, ㉢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선택하는 하나님이란 인식, ㉣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분 버림 받은 분이라는 인식,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선택의 계시라는 인식, 등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 신앙 이외의 ‘히틀러’라는 지도자 숭배나 ‘국가’우상화 숭배를 통한 권력 결집이 아니다. (이는 당연히, ‘통일’에 대한 ‘지도자’와 ‘통일국가’상태의 우상화 문제가지를 포함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고로 남북 문제에 백두돼지 김정은 편을 드는 개입은, 히틀러 파시즘을 대한민국에 수출했다는 비난을 받아 합당하다고 본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조선공산당운동을 포함했던 ‘민족유일당’(민족공산당)운동이었던 신간회에 연결된 신앙의 형태로서 기독교신앙은 至氣論적 하나님이다. 피차 공경하고, 피차 성실하며, 그렇게 어우러지는 공동체적 삶을 향유하는 믿음의 대상으로서 한울 神은, 동학사상에서는 신앙의 대상이지만 기독교에서는 ‘가짜 하나님’임이 명백하다. 천도교 신앙에서 상호성은 마을 연고 안의 상호성이면서, 종교지도자(귀족 지식인)에 매개되는 가짜 상호성이다. 천도교의 한울 神(기독교로 보면 ‘가짜 하나님’)은 중국의 上帝신앙이 유교로 존재하다가, 道敎의 老壯사상과 결합되는 과정으로 설명하는게 정확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 神’이 아니다. ‘마을 神’도 아니다. ‘민족 神’이나 ‘마을 神’을 주장하는 가짜 하나님은 『정감록』정도령 신앙처럼, 권력을 잡아 중앙을 차지하고는 유교의 春秋大一統을 구현하는 목적을 갖는데, 그것은 사실상 뼛속 깊은 ‘안티 기독교’의 실현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자신의 국가사회주의 정당을 거느리고 베를린에서 권력을 거머쥐었다. 프란츠 리프는 우리의 친구 슈미트의 라디오에서 히틀러의 권력 장악 소식이 흘러 나올 때, 그 라디오를 집어서 창 밖으로 던져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날, 바르트는 감기에 거려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였지만 “이제 내가…… 어디에 서야 할지, 어디에 서지 말아야 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사랑하는 독일 민족이 가짜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행동했다. 반대하느냐 마느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라우쉬닝은 국가사회주의의 밀교적 형태를 지목하면서 그것은 순수한, 철두철미한, 궁극적으로는 완전히 반 정신적이고 파괴적인 허무주의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핵심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이제 바르트는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들의 종교정책과 교회정책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 신앙의 고백을 뿌리째 뽑아 없애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목표는…… 오로지 점진적으로, 간접적으로, 온갖 위장을 동원했을 때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부랴부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었다. 그 책을 읽고 나니, 새로운 정권에 대한 바르트의 거부감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교회는 “여태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형태의 이런 원수”와 맞서 싸울 태세가 안 되어 있었다. 심지어 국가사회주의를 그런 ‘원수’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사실상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덜 도발적이고 덜 공격적인 온갖 잡다한 세력들에 자신을 너무나 쉽게 획일화했던 터라, 지금 이 순간 교회를 향한 저 졸렬한 요구를…… 신속하고 확실하게 거부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 요구란 교회자체를, 교회의 메시지를, 교회의 형체를 국가사회주의에 맞게 ‘획일화’하라는 요구였다. 바르트는 1919년 탐바흐 강연에서 만난 친구들, 이후에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었던 친구들 가운데 일부, 그리고 자신의 학생들과 청중의 일부가 이런 획일화에 가담하거나 그것을 적어도 가만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고민과 충격에 빠졌다. 어쩌면 바로 그랬기 때문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저 동의하고 아무도 진지하게 저항하지 않았기 떄문에, 나는 좋은 게 좋은거라며 침묵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위험에 빠진 교회를 향해 꼭 필요한 것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버 하르트 부쉬, 손성현 역, 『20세기 신학의 교부, 시대 위에 우뚝 솟은 신학자, 칼 바르트』, 복있는 사람, 2014. 391-392쪽)
한국교회는 위험에 빠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主라 고백하는 자유가 위태로웠던 기억을 다 잊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 한국교회는 표밭이고, 상인들에게 한국교회는 인맥 만들기 장소이고, 청년들에게 한국교회는 선남선녀 만나는 장소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친북좌파는 한국교회는 민중민주주의 민족해방 혁명투쟁의 사상전에서 반드시 장악해야 할 거점처럼 나타난 것이다. 보수교회에 정치목사로 간주되는 ‘정치돼지’가 신학대와 교회 개혁을 한다(좌파 사람을 채운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사. 단언컨대 기독교 ‘정치신학’은 유교의 ‘內聖外王’ 義理論이 아니다.
정치에 앞장서는 ‘기독교 집단’이라 불리는 집단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다. 1990년 이전에 반공권위주의 정권 때 사용된 용어들에 대해서는, 그 당시를 살아간 일반국민은 그렇게 들렸는지를 정말 몰랐다. 그러나, 2000년 전후에서 90년 이후로 반성하며 자제됐던 ‘빨갱이’라는 말은 다시 복원됐다. 반공시대에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한 일반국민이 반성하다가 반성을 멈춘 이유는, 이번호 『기독교사상』특집 기사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인식의 이중적 구조 혹은 분열증적 증후는 분단체제에서 살고 있는 상당수의 개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게다가 민주화 이후에는 단순히 북한이라는 타자에 대한 시선 뿐만 아니라 남한내 특정 집단이나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활용된 ‘빨갱이’나 ‘종북’이라는 낙인을 둘러싸고 분열증적 감정체계가 더욱 확산되었다. 예컨대 남한 주민의 경우 빨갱이로 명명되는 세력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북한 주민에 대한 우월감과 공포, 그리고 북한을 향한 애증의 감정 등 동일한 대상을 두고 모순적인 감정과 인식체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특히 빨갱이라는 기표는 시대와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확장되거나 재의미화되었고, 이제는 분단 기득권 세력에 반기를 드는 모든 집단에 덧 씌우는 일종의 주홍글씨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 기표가 일종의 사상검증의 잣대로 작동해, 모두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함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위적으로 구성된 이러한 기준이 내면까지 잠식하면서 자신의 의식과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성경, 앞의 글, 45쪽)
1988년 KNCC 선언은 反共만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아리안 인종주의로서 게르만 파시즘과 비교하는 문화를 만들었지만, 권력을 쥔 그들은 한치도 다를 바 없이 유교 문명권 아시아의 정치게임의 법칙을 쫓아가고 있다. 기독교 잡지의 특집부터 진영을 나눠서, <우리 편-상대편 나누는 것>은 기독교잡지가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되는 유교정치게임의 법칙이다. 그러면서, 깨끗한 척 하는게 가식적으로 보인다. 대체, 이런 정치를 후원하는 세계교회협의회나 미국 북장로교회는 <머리는 달고 다니나?> 싶어질 지경이다. 이런 문제는 국가로도 수정할 수 없고(민간에 개입한다고 말하며, 세계교회협의회 마피아에 홍보하면?), 민간으로도 불가능하다.(제도권 인사는 지적하면 직장을 잃을 것이요 필자같은 비 제도권 인사는 무시하면 그만일 것이다.) 분명히, 反 기독교 문제가 세계교회기구로 행해지는데, 아무도 이를 교정할 수 없는 일이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으로 박정희 정권이 온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무대가 마련되었다. 아니 이제 무대 자체가 무너졌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무덤에 殉葬된 셈이다. 자업자득이자 사필귀정이기도 하다. 이번에야말로 관에 단단히 못질을 해야 한다. 또다시 박정희의 僵尸가 출몰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 박정희에 대한 과도한 찬사와 가혹한 비판을 넘어, 박정희의 공은 공으로, 과는 과로서 평가하자. 박정희 시대의 밝은 면은 밝게, 어두운 면은 어두운채로 드러내자. 이제야말로 독재와 정경유착, 그리고 남북대결을 넘어서야 한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무덤에서 나온 박정희의 망령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촛불집회로 정권을 교체하고 적폐청산에 나선 지금, 박정희 정권의 공과와 명암은 한낱 ‘옛이야기’일 분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안의 박정희’를 몰아내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신민, 국민, 시민, 민중의 정체성이 공존한다. 대한민국의 현대를 만들고 현대를 완성해 나가는 프로젝트는 깨어 있는 시민 개개인의 몫이다. 우리는 깨어 있지 않으면, 또다시 박정희의 유령에 쫓길지도 모른다. 이념과 제도는 결국 개인에서 완성된다. (정일준, 「박정희 정권의 유산,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기독교사상』, 2018.5. 22-23쪽)
특히,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조직신학은 송시열 예송논쟁에서 ‘주자학 제사도덕’ 같은 <껍데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조선 정쟁에서 송시열 예송논쟁은 권력투쟁이 실상이면서, 거창하게 포장한 명분이 주자학 제사도덕인 것으로 온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조선후기 붕당정쟁 권력 투쟁의 주자학 제사도덕이, 20세기와 21세기에 와서는 기독교 조직신학으로 바뀐 게 전부가 아니냐는 냉소주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대통령 국가조찬기도회를 통로 삼아 국가권력과 기독교계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책과 통치 이념을 지지할 수 있는 기독교 세력을 얻을 수 있었고, 기독교계는 권력의 인정 속에서 부흥과 성장을 이를 수 있는 조건들을 얻었다. 그런데 양자가 이렇게 밀착할 수 있었던 것은 김준곤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되듯이 개발과 발전이라는 통치 이념과 성장과 부흥이라는 교회의 열망이 상호 시너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조찬 기도회라는 回廊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치 이념과 교회의 부흥 성장이라는 신념이 밀착되었고, 이러한 정교밀착은 국가권력의 안정과 기독교계의 종교적 기득권 보장이라는 상호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후 국가조찬기도회는 1965년부터 1970년가지 초기 대통령 조찬 기도회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2018년 국가조찬기도회가지 흘러왔다. (최태육, 「초창기(1965-70)의 국가조찬기도회」, 『기독교사상』, 2018.5)
민주화운동이 민중신학 목회자가 중심이고, 민중신학 목회자는 성서적 예수그리스도보다는 천도교나 他종교의 神을 기독교의 예수님처럼 불러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몰트만 신학을 조직신학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고, 과거에 몰트만 신학 사용은 천도교 신앙 등 非기독교의 정치신학을 정당화하는 송시열의 ‘제사도덕’같은 수준이었다. 2018년 현재는 몰트만 신학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리가 가능한 사람이 어느 정도 깔린 시점이나, 과거를 설명할 때는 이렇게 자의적 사용처럼 나타난다.
몰트만 신학은 한국교회에 3가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민주화운동이 복음의 실천이요, 선교적 사명을 행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 불의에 대한 항거가 복음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복음 선포는 사회적 정의와 민주적 자유를 강하게 요구한다. 몰트만은 복음을 억압하는 자유를 실현하는 해방의 길이요, 하나님 나라의 희망 속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정치적 해석학이라고 하였다.
둘째, 민주화를 위한 투쟁속에서 당하는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적 제자의 길임을 알려주었다.
셋째, 사회문제에 소홀한 한국교회에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하나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몰트만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기본권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강조하였고,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교회는 공적 증언과 사회비판, 권력 비판을 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국기독교는 군사독재 시대에 민주화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제 한국교회는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할 일이요, 몰트만이 말한 복음의 사명과 교회의 공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유석성, 「위르겐 몰트만과 한국의 민주화운동」, 『기독교사상』, 2018.5. 7쪽)
민중신학의 예수 신앙은 거의 대부분 후천개벽 정역사상의 종말론을 정당화하는 취지로 사용된다. 현실을 불만덩어리로 묘사한 뒤, 이를 해소할 주관적 만족이 달성될 미래가 온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 마을/다른 마을> 이분법을 통해서 권력을 자기 마을에 고정하는 권력의 기술을 보여준다.
촛불혁명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현 시점에서 수구세력은 여전히 분단체제의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를 활용하는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촛불혁명 이전에 출현했던 비정상성이 분단체제 하에서는 정상성에 가까운 것이고, 이는 우리 사회에 내재돼 있어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언제든지 사회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수구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시민 주체의 새로운 정치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이남주, 「분단해소인가, 분단체제 극복인가」, 『창작과 비평』, 2018년 봄호. 21쪽)
하지만 분단체제론이 남/북의 지배층이 분단을 활용하여 기층민중을 억압해 왔다는 사실을 적실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판단과, 분단체제의 극복 없이는 진정한 사회변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 87년 체제를 거치면서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론이 갖는 설명력과 개념적 유효성은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김성경, 「분단체제에서 사회만들기」, 『창작과 비평』, 2018년 봄호. 41쪽)
한국인들의 민족신앙은 대접 받을 가치가 있다. 한국인이 부정하더라도 민족성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 민족신앙이기 때문이다. 민족신앙은 고대 제정일치 사회를 희구한다. 이러한 민족신앙은 고대 씨족 사회의 공산주의 경향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1990년대 이후에 어찌된 일인지, 그 이전에 ‘아니오’했던 민족신앙을 차츰 강화하더니 완전히 함몰해 버렸다. 특히, 히틀러 체제에 저항한 고백교회 운동을 기반으로 한 세계교회협의회가, 완전히 180도가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중신학 집단을 후원하여 한국의 易 복음화를 추진한 것은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일 것이다.
**) 필자의 최종주장
㈀ 美北대화는 통일운동의 한 과정으로 이행된다. 이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상에서의 종교의 자유가 지켜지는 사회이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법치주의와 인권 문제가 모두 무너지게 된다.
㈁ 한국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말하고 있다. 이는 동시에 남북연합체도 법치주의와 ‘위임’을 초과한 권력 만용(탈북자 북송 시도 같은)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명한다.
㈂ 이는 한국의 통일운동이 세계교회협의회 하의 독일교회와 미국의 북장로교가 신종교 무당신앙이 동방기독교 영성과 같다는 민중신학 설교자들의 주장을 액면가로 믿은 결과로 기인했고, 이 댓가는 한국사회에 파시즘 사회의 수출로 나타났다. 이는 민간으로도 국가로도 아무도 못 고치는 ‘구조악’의 수출이 됐다.
㈃ 이를 깨는 방법은 히틀러 파시즘 사회를 싸웠던 독일의 ‘고백교회’운동이 참고 가치가 된다. 한국 사회의 매스미디어를 통한 한국 민족신화를 남용하는 대중선동에 ‘아니오!!’ 하고, 이런 민족신화의 한국교회 침투에 대해서도 ‘아니오!’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판 고백교회운동>은 동시에 한국교회를 살림과 동시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살린다고 생각한다. - 이게 없다면, 매스미디어의 파시즘 선동에 낚이는 국민대중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북한은 북한공산당을 해체하지 않으려 하며 그 속에서 개혁된 모습을 주장한다. 미국은 < 북한공산당에 충성 중심으로 왜곡되지 않은 가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세계사회에서 흔하게 가능한 성서적 복음이 북한땅>에 들어갈 자유를 허락하라고 주장해야 한다. 한국 보수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북한 선교’다.
㈅ 남북한의 스탈린 씨족간의 결합으로 <韓美同盟派>를 압박하고 억압하려는 계기에 맞서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헌법 조문을 마련하고도 오랫동안 구현하지 못했던 국민교육을 만들어야 한다. ‘빨갱이를 배척하자는 反共시대’의 특정한 귀족을 관직에 앉히기 위주의 이분법이나, ‘적폐청산’이름의 反반공 캠페인으로 민족해방 공산귀족을 앉히기 위주의 이분법을 모두 부정하야 한다.
북한공산당이 전제의 남북관계가 아닌 한, 자유민주영역이 단결하지 않으면 남북관계에서 권리에 큰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스탈린 씨족 단독행위로 어떠한 행정 집행을 할 수 없도록, 기독교 국가 본래의 ‘횡적 연결’ 관점을 세계교회협의회와 연결된 정치가 구현하도록 세계교회와 함께 압박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게 되면 ‘파시즘 구현’의도라고 세계교회와 함께 좌파정치를 압박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판문점 선언 선전선동 한번에 와르르 대중정서가 무너진 계기에는 국민교육에 대하여 94년 이래 24년간 고의 방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조x제씨가 추구하는 ‘박정희’ ‘이승만’ 2인 우상화 교육은 한국이 고대국가가 아니며, 고대국가로 수렴하는 차원으로 근대자유국가를 설명할 수 없는 황당 버전이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