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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세르스 9화
도포청10
201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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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회상은 끝나고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마침내, 도착했어.’
지크는 마침내 왕국 앞에 다다랐다.
가시나무의 둠 앞에 섰다.
약간의 틈도 찾아볼 수 없는 빽빽한 공간이었다.
지크는 귀검수라도를 들었다.
전류가 검을 감쌌다.
그는 떠올렸다. 락시가 알려준 해답을.
역시 그의 말대로였다.
가시나무의 둠은 사형장에서 왕궁으로 이동해있었다.
‘정말로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크는 아프락사스와 한 대화를 떠올렸다.
그 햇살이 비치는 배의 집무실 안에서 락시는 앉아있었고, 지크는 그 앞에 서있었다.
락시는 말했다. 일의 진상을,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대답을.
“너의 공주의 정체는 말이야. 바로 씨앗이야.”
“뭐?”
“공주는 초월종이 아니야. 하지만 인간도 아니지. 참 특이한 존재야. 그래, 그녀 자체가 아티팩트라는 거지.”
“아티팩트는 물건이잖아.”
“아티팩트의 종류는 여러 가지야. 그것이 생명체인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해. 너의 공주는 아티팩트였어. 그것도 정말로 엄청나게 강한 아티팩트지.
지크, 그것은 ‘생명의 열매’라 불리는 아티팩트야. 그녀는 생명의 씨앗이었다가, 때가 되자 씨앗에서 싹이 튼 거야. 네가 본 그 참극이 바로 그거지. 그것은 파괴와 파멸이 아닌, 싹이 튼 것이었어. 생명이 태어난 거지. 공주는 살아있어. 지금도 점점 자라나고 있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아, 그럼 한번 직접 그곳으로 가 봐. 싹의 중심이 이동했을 걸? 공주의 기호대로 말이지.”
“...”
“좋아, 그럼 내 말을 계속 들을 거야?”
“한번 들어주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계속 말해.”
지크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공주가 살아있다니, 상상만 해도 몸을 주체할 수 없다.
“좋아, 지크. 아무튼 간에 말이야. 왕국의 멸망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거지. 인간들이 공주의 성장을 버티지 못한 것뿐이야.”
“그 가시나무 줄기들은 뭐지?”
“그건 줄기가 아니라 뿌리야. 아까 내가 말했듯이, 공주는 생명의 씨앗이야.
그리고 그녀는 뿌리에서 흡수한 영양분으로 생명의 열매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생명 그 자체지. 그 열매 안에 생명의 모든 것이 들어있어.
그녀가 인간의 모습이었을 때는 단순히 씨앗이었어. 그 참극은 씨앗에 싹이 튼 것이었고, 싹이 튼 다음 뿌리가 씨앗에서 빠져나온 거야. 그 가시나무들은 바로 뿌리에 불과해.
물론, 뿌리라고는 해도 엄청나게 큰 거지. 일반적인 식물을 생각하면 안 돼.
뿌리의 크기에 비해 정작 본체(열매)는 굉장히 작거든.
자아, 가시나무 밭 중심에 가시나무로 된 둠이 있을 거야.
공쥬는 그 안에서 있어.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아마 지금쯤 열매를 맺었을 거야.
그 아티팩트는 꽃을 맺을 필요가 없으니까, 바로 열매를 맺거든.
그리고 그 열매가 바로 해결의 실마리야.”
“...”
지크는 계속 들었다.
“공주는 열매 주위를 지키고 있어. 네가 할 일은 간단해.
자아, 이제부터 알려줄 테니 잘 들으라고.”
지크는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가시나무 둠에다 검을 휘두르기 직전,
촘촘히 엮인 가시나무가 움직이며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 구멍 너머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지크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보는 그리운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지크에게 말했다.
“안녕, 지크. 기다리고 있었어.”
“...공주님.”
“오랜만이야..”
“정말로, 공주님인가요?”
공주는 웃었다.
“어머, 지크는 변함없이 멍청하구나. 내가 공주가 아니면 누구겠어. 자아, 안으로 들어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거든.”
지크는 공주를 따라 가시나무의 둠 속으로 들어갔다. 곧 구멍은 다시 닫혔다.
안은 깜깜했으나, 천장 위에 스스로 빛을 발하는 꽃이 여기저기 피어있어서 은은하게나마 주위가 보였다. 마치 밤하늘 아래 있는 기분이다.
“자체 발광이야. 멋지지? 열매는 햇빛을 싫어해서 이렇게 만들었어. 나도 어떻게 만든 건지는 모르지만. 신기하지?”
지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시나무의 둠은 왕궁을 통째로 뒤덮고 있었다. 지크는 마치 과거 왕궁의 밤하늘 아래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여긴 나의 왕궁이야. 나는 이곳의 유일한 공주고. 좀 외롭긴 하지만 의외로 지낼 만 해.”
“그러셨군요. 전 공주님이 살아계셔서 기쁩니다.”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나저나 지크, 꼴이 아주 말이 아니구나. 저런, 눈 밑에 아주 피곤이 절여있네, 절여있어. 밥은 잘 먹고 다녔어?”
“전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제가 반신반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겠죠.”
물론 반신반인인 그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공주님을 만난 지금, 그런 것은 아무것도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지크....”
“공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말해봐. 지크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도 있어.”
“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아니.”
“지금 제 안에는 공주님의 각성으로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폐하의 영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공주님. 당신은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아, 다시 왕국을 재건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공주님.”
“그래서,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하겠다, 이 말이구나.”
“예,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제가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공주님, 부탁입니다. 비록 왕국을 되돌리는 건 무리일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억울하게 죽은 제 안의 영혼들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해줄 수 없겠습니까, 공주님...”
“...”
“부탁입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그래...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은 지크의 안에 있었구나. 그 사람들이 지크를 괴롭히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그 사람들은 억울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지크...”
공주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안 돼.”
“공주님?”
공주는 차갑게 말했다.
“그런 녀석들한테 내 호의를 베풀어줄 수는 없지.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 인간들은 말이야, 내가 죽을 때 나를 저주한 놈들이야, 환호한 놈들이야. 그런 녀석들은 죽어도 싸지. 지크, 녀석들을 당장 밖으로 내보내. 그런데 녀석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니 구역질이 날 지경인걸. 나의 왕국을 더럽히지 마.”
“그, 그 사람들도 속으로는 두려웠을 겁니다! 인간들이 그러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크, 내 말에 토 달지 마. 그 사람들을 당장 밖으로 내보내. 지크를 괴롭히는 녀석들이라니, 참을 수가 없는 걸. 아, 여기서는 내보내지 말고, 밖에 나가서 내보내.”
“그, 그럴 수는...”
“시끄러워. 내 성미를 잘 알고 있잖아? 입 다물어. 그럼 내가 널 기다렸던 이유에 대해 슬슬 말할까 해.”
공주는 왕궁으로 들어갔다. 공주는 왕궁 복도를 걸었다.
지크는 그 뒤를 따라갔다. 그는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공주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왕좌가 있는 곳. 과거 신하들과 여러 나랏일을 지시하고 행하였던 곳. 바로 왕궁의 가장 큰 공간이자 중심부였었다.
그곳 한 가운데 거대한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알이었다. 세로로 길쭉한 알. 공중에 일정한 간격을 둔 채 떠있는 알. 지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락시가 그에게 가르쳐주었으니까.
“생명의 열매야.”
공주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의 공주였지만, 지금부터는 모든 생명들의 여왕이 될 거야. 아니, 여신이 될 거야!”
“...”
“이 생명의 열매는 말이야. 한번 깨어지고 나면. 이 지상의 모든 생명들을 나의 방식으로 변이시킨 채로 조종(control)할 수 있어. 어때, 끝내주지 않아? 뭐, 초월종까지 조종하는 건 무리지만, 어차피 그 녀석들은 엄청나게 수가 적잖아?
녀석들을 제외한,
이 세상에 있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모든 인간들을 내가 조종할 수 있다는 거야!”
락시에게 들은 대로다.
“지크, 물론 너 같은 반신반인에게는 안 통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한 사람쯤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
지크, 다시 내 호위무사로 들어 와. 그리고 나를 곁에서 지켜줘. 넌 공주의 호위무사가 아니라, 이제 여신의 호위무사가 되는 거야,
자아, 이제 평생 같이 있을 수 있어.”
“그, 그렇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영혼을 다룰 수는 없고, 꿈틀거리는 생명만 다룰 수 있으니까.
그런 영적인 것을 다룰 줄 아는 존재가 필요해. 그게 바로 너잖아.
우리가 같이 있으면 어느 것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순 없어. 우린 천하무적이야!”
“...그런가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생명의 열매가 태동할 거야. 이 열매는 햇빛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금 이 왕궁 안으로 갖다놓았지만, 계속 이 안에 두는 것도 위험해. 이제 슬슬 옮겨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아. 그나저나, 지크. 내 호위무사. 계속 할 거야, 말 거야?”
“저는...”
아프라사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주는 생명의 열매를 지키고 있을 거야. 그녀는 언젠가 ’생명의 여왕‘이 될 존재거든.”
“생명의 여왕이라니?”
“자아, 그 ’생명의 열매‘라고 불리는 건 말이야.
폭탄에 비유하면 이해가 될 거야.
그건 일종의 폭탄이야.
그걸 하늘로 쏘아 올리는 순간, 일은 시작 돼. 무슨 일이냐고? 내가 가르쳐 주지.”
락시가 말한 바로는 다음과 같았다.
생명의 열매. 그것이 공중에서 터지면, 수많은 포자가 지상으로 흩뿌려질 것이다.
높이 터질수록 더욱 좋다. 더 멀리 퍼지니까.
포자에 닿은 생명체는 ‘변이’를 시작한다. 조종하기 쉽게 신체구조가 바뀐다.
그렇게 생명의 여왕은 그것들을 자신의 시종처럼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변이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들과 접촉하면 그 접촉당한 생명체들도 변이되며, 여왕의 종으로 변해버린다.
사실상 ‘변이’가 아닌, ‘감염’하고 다를 바가 없지만 아무튼 생명의 열매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걸 공주님이 하고 계신다고?”
“그렇지. 뭐, 공주 자신은 자신의 본능에 의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겠지만.
지크.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 일에 대해서 말이야.
네가 겪은 그 참사보다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날 거야. 아마 무수한 생명체가 죽고 또 죽겠지.”
“내 바람은 내 안의 영혼들에게 보상하는 일이야.”
공주가 살아있다니,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그는 이제까지 죗값을 갚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공주님이 살아계시다니...
“하지만 너는 공주가 살아있다는 걸 몰랐잖아, 전혀.”
지크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락시는 그런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 혼란스러운 것도 이해가 가. 그럼 일단 내 말부터 해볼게.
너는 공주를 만나고 싶고, 또 너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고 싶겠지.
일단 뒤의 문제는. 공주가 지배한 생명 안에 네가 영혼을 집어넣으면 해결될 일이야.
원래 자신의 영혼이 아닌 다른 존재의 영혼이 들어오면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켜 죽어버려. 하지만 네가 공주에게 부탁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인간들을 변이시킬 수 있어.
그럼 일은 간단하지, 안 그래? 영혼을 어딘가에 집어넣는 일은 너의 영적인 힘으로 가능할 테니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변이된 인간들에게 영혼을 집어넣으면 끝나는 일이야.
자아, 그럼 그 문제는 해결되었군.
가서 공주에게 부탁해. 공주가 수락하면 해결될 일이야. 뭐,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럼 앞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고. 공주에 관련된 문제로.”
락시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를 불려낸 이유가 바로 이 문제거든.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모든 문제의 중심은 바로 그녀야.”
락시는 다소 흥분한 듯이 보였다.
“생명의 열매가 공중에서 터지는 날에는, 우리 왕국은 끝장이야. 멸망한 그녀의 왕국과 가까이 붙어 있잖아. 포자가 떨어지는 범위 안에 우리 왕국도 포함되어 있어.
그럼 우리 왕국은 멸망이야. 이봐, 나는 아프락사스이기 이전의 왕국의 왕자야. 왕의 후계자라고. 이건 아주 큰 문제야.”
“내가 너희 왕국을 위해 일을 할 의무는 없지, 안 그래?”
“물론 그렇겠지.”
락시는 웃었다. 지크는 거의 망가진 머리였지만 그래도 이상한 점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봐, 왕자.”
“락시라고 부르라니까.”
“너는 앞서서 내 두 번째 문제의 해결방안을 말했어. 그 해결방안이라는 게 그 생명의 열매가 터진 후에야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너는 왕국을 지켜야 한다면서 열매가 터지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를 하고 있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정확히 짚었어. 지크, 너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 공주와 생명열매의 힘이 필요해.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나의 왕국을 지키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우리들에게 너를 막을 힘은 없지.”
“잘 알고 있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 락시는 지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결론은, 생명의 열매가 포자를 흩뿌려도, 우리 왕국에게 피해만 오지 않으면 된다는 거지.
자, 이건 텔레포트 아티팩트라는 거야. 특이하게도 사람을 이동시키는 것이 아닌, 대상 전체를 이동시킬 수 있는 물건이야.
대상 전체의 중심이 되는 물건에 이것을 놓은 다음에 가고 싶은 장소를 상상해. 그런 다음에 ‘작동’이라 말하면 그곳으로 이동될 거야.
이걸로 가시나무의 둠을 이동시켜. 가시나무 둠의 중심이 되는 물건은 ‘생명의 열매’겠지.
그럼 그것에 이걸 놓고 장소를 상상한 뒤에 ‘작동’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우리 왕국하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간 다음에 생명의 열매를 터뜨리는 거야. 어때? 그럼 모두 좋잖아?”
“크크큭... 크크크크큭...”
락시는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 같아? 왕자. 나는 너희들이 싫어. 너희 푸른 나비 녀석들이 싫다고. 너희들은, 우리가 죽어나갔을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잖아. 냉대했었지.”
“그래서, 우리들을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거야? 생각해봐. 너도 알 거 아니야. 인간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남들을 단호히 배척하는 존재야.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너희 공주가 처형당할 때, 너희 왕국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알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건 우리만 다른 게 아니야. 인간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야. 우리 왕국 인간들도 마찬가지고.
열매가 터지는 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거야. 왕국 간의 이해를 넘어서, 같은 인간으로서 그런 대참사를 방치할 수 있어? 그런 사태를 또 두고 볼 거야?”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그거 저리 치워.”
락시는 한숨을 들이쉬었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들어준 답례로 받기만 해. 꼭 그 일에 안 써도 되니까. 이 아티팩트는 다른 곳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테니.”
“좋지, 그럼 받아만 두겠어. 그나저나 너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뭐,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왕국 인간들을 모조리 피신시키던가 해야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고 또 생명열매의 범위를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관심 없어.”
지크는 몸을 돌렸다.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지크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나저나, 왜 나를 쫓았던 거야? 그 검은 또라이들을 시켜서 말이야.”
“공주와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거든. 그래서 널 잡아오고 싶었는데. 뭐, 결국 이렇게 직접 대화로 풀게 되었잖아?”
“시시하군.”
지크는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레이첼이 서있었다. 지크는 그를 보고 웃었다.
“뭐냐, 레이첼. 여기서 한 판 하려는 거냐?”
레이첼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프락사스, 배가 곧 도착합니다.”
“좋아. 지크, 배가 곧 너의 왕국이었던 곳 근처에 도착해. 어딘지는 알 거야.”
“그거 고맙네.”
레이첼은 옆으로 물려났다. 지크는 레이첼을 향해 웃어준 다음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 걸음이 더 빨라져 갔다. 문을 부술 듯이 열더니 갑판 위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배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후 그는 멸망한 왕국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지크. 호위무사 할 거야 안할 거야?”
“...”
“지크?”
“저는 처음부터, 공주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의 호위무사였습니다.”
“아아... 그랬었지, 그랬었구나.”
“공주님, 부디 제 안의 있는 영혼들의 안식처를 제공해주십시오.”
“뭐야, 또 그 이야기야? 지크. 난 그 녀석들이 싫다니까. 녀석들은 나를 마녀라 부르며 욕하고 돌을 던졌어. 죽어 마땅해.”
“만약 그렇게 못하시겠다면, 저는 당신을 떠날 겁니다.”
지크는 자신이 말을 하고도 믿지 못하였다. 공주는 놀란 눈으로 지크를 보았다.
“뭐야, 그 말... 진심이야? 넌 한 번도 내게 그렇게 말한 적 없잖아...”
“아뇨, 진심입니다.”
지크의 단호한 말에 공주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지크가 나에게...”
“공주님. 선택하세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 부탁을 들어줘요.”
“네가 감히...”
“아니면 저는 떠나겠습니다.”
그의 발아래 가지가 자라나더니 그를 감쌌다. 가둔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자신의 몸 주위에 푸른 전기를 흘려놓는 것만으로 가지에서 풀려났다.
그는 걸었다.
둠 밖으로. 바깥으로.
“잠깐, 지크! 잠깐!”
공주는 그에게 달려오더니 그의 등을 안았다.
“알았어, 들어줄게. 들어주면 되잖아! 정말로, 너무 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변했어? 예전에는 말 잘 들었잖아!”
“...죄송합니다.”
“됐어, 됐다고! 좋아, 그런 과거의 일들은. 지금은 이렇게 둘 다 살아서 같이 있는 걸로 충분하잖아! 좋아, 지크. 네가 용서해달라고 하면 그들을 용서하겠어! 그러니, 이제 서로 다시 헤어지는 일 만큼은 그만하자...”
“공주님...”
“이렇게 같이 있는 걸로 충분히 만족해. 더 바랄 것이 없어. 이제 다투는 일은 그만하자. 그리고 이제부터는 계속 함께하자. 나, 외로웠어.”
지크는 몸을 돌려 그녀를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왔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무리한 부탁을 해서. 심한 말을 해서. 이제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을 겁니다.”
“지크...”
둘은 이렇게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다.
공주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말했다.
“그래, 지크도 돌아왔으니... 바로 내일 일을 시작해도 될 거 같아. 충분해. 내일 바로 시작하자.”
“그 생명의 씨앗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일말입니까.”
“그래, 그럼 나는 생명의 여신이 되는 거지.”
“공주님, 그것하고 관련해서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만...”
밤이 되었다. 가시나무로 뒤덮인 성벽과 도시는 매우 적막하고 고요했다.
보름달 아래 있는 폐허는 알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성벽 위에 검은 색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서있었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은 사제, 다크 프리스트들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레이첼도 서있었다.
‘작전을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 날을 위해 준비된 자들이었다.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아프락사스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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