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링크 : http://www.ilbe.com/394980897
.
2. 박정희 정부 (1961.5.16 ~ 1979.12.12)
분량상 적당히 최규하 정부도 같이 다룰 거야.
글을 크게 나누자면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2차/유신이후/총평으로 나눌거야.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의 경우 기획만 해두고 흐지부지 한 것들이 너무 많고
자료도 남아있는게 적어서 평론하기 애매했지만 원조가카 이후로는 계속 글의 마지막은 총평으로 끝내볼까 해.
2-1.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1.5.16 ~ 1966.7.29)
대통령 권한 대행 박정희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 경제상황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어.
1부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미국의 원조정책이 유상차관형식으로 바뀌면서 무작정 원조물자에 의존하기보다는
※무상원조형식이든 유상차관형식이든 간에 원조물자가 들어오긴 들어와.
다만 유상차관형식은 들여오는 원조물자에 대한 결제를 차관형식으로 해야만 하는 거였지.
무상원조는 무상급식마냥 원조물자에 대해 지불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유상차관은 나중에 갚아야할 것들이라는 거야.
국내산업을 진흥시켜 국민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만 했었지.
그래서 장면 내각에서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1)을 만들어 원조물자를 대체할 소비재 공업을 육성하고자 했었어.
하지만 장면 내각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1)은 5.16으로 인해 장면 내각이 무너지면서 폐기되었고
대통령 권한 대행 박정희에 의해 1962년 1월 13일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가 만들어져.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아.
①농업 생산력 증대 ②전력·석탄 등의 에너지 공급원 확충
③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 충족 ④유휴자원 활용
⑤수출증대로 국제수지 개선 ⑥기술진흥 등. 정유·비료·화학·전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그 당시 개발도상국에는 종속이론이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선진국에서 수입할 수 밖에 없는 소비재의 수입대체전략을 쓰고 있었어.
그러니까 장면 내각 역시 바보라서 그런 수입대체전략을 택한건 아니야. 평타취였지.
그 당시 대만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수입대체전략을 택했었거든..
물론 박정희 정부의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또한 그런 맥락에서 추진되었지만
소비재의 수입대체보다는 산업재의 수입대체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조금 달라.
수입대체전략은 대만과 마찬가지로 관세를 올려 수입소비재의 유입을 차단하여 국제수지를 개선시키고 이를 국내 산업으로 대체하는데
박정희 정부 하에서는 수출증대로 국제수지를 개선시키고 소비재에 대해서는 일부 대체, 일부 수입 형식이었어.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적 자료는 없다만은, 관세청 통계는 1988년부터거든.. 그래도 당시 수출입 상황을 보면 대충 이해가 갈 거야.)
소비재 : 슨상님이 좋아하는 옥수수와 같이, 소비자가 직접 사용하는 재화.
산업재 : 철강, 금속, 기계같이 최종상품 생산에 필요한 재화야.
빨간건 성장률, 파란건 GDP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치와 성과는 다음과 같아.
※1) 1963~66년 평균(자료 : 경제기획원,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 1982~86)
산업성장과 경제성장율 목표치는 당시 지나치게 의욕적이다. 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무리하게 세운 감이 있지만, 박정희 정부는 이를 초과달성 할 정도로 당시 대한민국 경제는 양적 성장을 이룩했어.
하지만 수출량의 폭발적인 증가에도 불과하고 수입량 또한 늘어나면서 오히려 무역수지는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지.
이에 대해 좌좀들은 박정희 때문에 당시 무역수지 적자만 엄청 봤다고 비난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아. 무역수지는 감당 가능한 선에서는 적자라고 나쁜게 아냐.
국제수지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어. 경상수지와 자본수지.
경상수지라는건 일반적인 통상 거래에서 생기는 흑자 또는 적자의 값이야.
상품(상품의 수출입), 서비스(서비스의 수출입), 본원소득(노동, 투자소득 등), 이전소득으로 나누어져.
자본수지라는건 자본의 유입 또는 유출에서 생기는 값이야.
당시 대한민국 경제는 경상수지에서는 적자를 심하게 봤을지는 몰라도 자본수지는 한일회담과 경제개방에 힘입어 상당한 흑자를 기록했어.
(정확한 국제수지 통계는 1980년부터 작성됬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찾을 수 없어. 미안.)
그러니까 박정희 정부 하에서 대한민국의 경상수지가 적자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난하는 좌좀들에게는 이렇게 일침을 가해주면 좋겠어.
"니들은 잃어버린 200년을 찾아 애덤 스미스 이전의 중상주의 시대에 살고있냐"
여하튼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목표치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대한민국 경제가 날아오르는 데에 밑바탕을 까는데 성공했어.
대한민국 1인당 평균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5년 새에 50%가량 상승했지. (옛날 자료는 GDP보단 GNP를 많이 쓰는 경향이 있어.)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하에 대한민국에 건설된 기간 산업은 다음과 같아.
한국전력주식회사(1961.7.1) 현재의 한전이야.
쌍용시멘트 (1962.5.14) 최초의 시멘트 회사
새나라자동차 (1962) 최초의 자동차 회사
울산 공업지구 (1962.2.3) 아! 올해로 50년 기념 행사 했다!
울산 정유공장(1963.3.12) 현재의 울산 석유화학공단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1962.6.21.) KOTRA
호남비료주식회사 (1963.9.9) 현재 민영화
광주공업단지 (1966.12.16) 7시 멀티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로써 사실상 대한민국 경제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어.
2-2.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6.7.29 ~ 1971.2.9)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박정희
월남파병 (1964.9.11 ~ 1966.10.3)
한일협정 (1965.6.22)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외자 8억 달러를,
월남파병으로 1962~1973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외자 8억 5750만 달러를 확보해
(장병들 월급을 포함한 수출 외 수입 6억 4,190만 달러, 수출 및 물품군납 2억 1,560만 달러)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초과달성과 확보된 외자를 바탕으로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해.
뭐 한일협정이 굴욕 조약이었다. 월남파병에 문제가 많았다. 하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나는 무식한 경제쟁이라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들에 대해선 잘 몰라. 그래서 여기에 대해 살펴보진 않을거야.
물론 외자도입을 위해 박정희 정부가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국내자본 육성에도 소홀히했던 건 아냐.
금융현실화 조치를 통해 금리를 조정하여 저축을 유도함으로써 박정희 정부는 시중에 떠도는 자금들을 투자 가능한 자본으로 만들었어.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아.
①식량자급·산림녹화·수산개발 ②화학·철강·기계공업 건설에 의한 공업고도화 및 공업생산배가
③7억 달러 수출 달성 ④가족계획 추진에 의한 인구억제 ⑤국민소득 증대 ⑥인적자원 개발.
⑦ 저축증대를 위한 경제안정정책의 추진과 사금융시장의 제도금융으로의 흡수 등 금융제도의 보강, 대중의 은행거래 관습의 제고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는 아무리 박정희 정부가 급진적인 인사들로 이루어졌다 해도
당시 대세였던 수입대체전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수입대체를 위한 노력이 일부 행해졌었어.
하지만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과 외자유치에 탄력받은 박정희 정부는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수입대체전략을 폐기하고, 수출위주의 산업경제를 육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해.
당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너무 성공적이었기에, 자립경제면 족하다라고 판단한 사람들은
제 2차 경제개발 계획을 3년 반으로 축소하자는 주장까지 전개했었어. 사실 수입대체정도야 거의 달성했거든.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오히려 1968년에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대수정해버려.
이런 점에서 나는 제 3공화국 시기의 원조가카에 대해 상당히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해. (현재의 종북진보말고.)
미안 1971년도 자료가 누락됬지? 한국은행이 1970년 이전/이후로 나눠둬서 그래.
1971년 자료부터는 2005년 기준으로해서 지표를 만들다보니 부득이하게 삽입할 수가 없었어.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상당히 무리한 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과달성에 성공하자,
자신감이 붙은 박정희 정부는 제 2차 경제개발 계획 목표를 더더욱 높여잡았지.
그런데도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차와 마찬가지로 계획을 훨씬 상회하는 실적을 세워버렸어.
비록 이 과정에서 저곡가정책으로 농업경제가 파토나고, 곡물 수입이 증가했기는 했지만
이러한 과정은 공업화에 있어 필연적인 일라고 할 수 있어. 만약 좌좀들 주장처럼 박정희 대통령이 농민들을 다 죽이려 했다면야
19세기 영국처럼 농산물에 대한 수입장벽을 깨붜서서 아예 농산물 시장을 개방해버렸겠지?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까지도 WTO의 쌀 시장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있지않아. 2014년까지 유예중이지.
이 기간 동안 무리라고 판단될 정도의 높은 경제 성장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투자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어.
앞에서 설명했듯이 저축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금융시장을 정상화했고, 해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어.
박정희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있는 많은 선동가들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박정희가 아니라 우리 노동자들이 행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물론 노동자들이 피땀흘려가며 조국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이러한 자본 등, 성장의 선결과제가 노동자들의 힘만으로 가능했을까?
그게 노동자의 힘으로 가능했다고 우긴다면야 걔는 토론할 생각이 없는 거니까 그냥 지 할말하게 놔두는게 나아.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로 국민 소득은 대폭 증가, 산업구조도 개편되어 고도산업사회로 진출할 토대를 닦았어.
저축율 향상과 외자 유치에 힘입어 투자율 또한 대폭 증가했고 이로써 대한민국 경제는 날아오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내두었다고 할 수 있지.
수출량 또한 3억 달러 (1967) -> 11억 달러 (1971)로 대폭 증가했지만, 그만큼 수입량도 늘어나서 무역수지적자가 1억달러를 기록해.
그 결과 대한민국 경제에 한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국의 원조물자규모도 대폭 축소되어 비로소 자립경제를 이루게 된 거야.
여기에 더해 박정희 정부는 본격적으로 수출산업을 육성지원하기 위해 수출지원금융이라는 걸 실시해.
외화대출취급규정을 제정하여,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기업이 필요로하는 외화자본을 수출기업과 월남전 군납기업에 몰아줘.
거기에 더해, 수출용 상품의 원자재수입어음의 금리를 대폭 인하하여 (5% 수준. 당시 5%면 거저수준이었음.) 수출기업에 계속 날개를 달아주었지.
당시 한국은행이 이를 담당했는데, 1971년도에는 수출지원금융의 89.2%를 한국은행에 의존했어.
다만 여기서 문제는 수출지원금융의 경우 완전히 수출기업을 밀어주기 위한 정책이었기에 거기에만 충실했지,
이를 위해 수출지원금융은 통화규제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는 중앙은행의 화폐 관리력을 떨어뜨려 인플레이션을 가속시켜.
※왜 수출지원금융때문에 인플레이션이 가속되었을까?
인플레이션이라는건 1부의 미군정기를 설명할때도 이야기했다시피, 시장에 풀린 돈이 많아질 경우 그에 비례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야.
시장에 돈을 많이 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당연히 화폐를 많이 발행하면 되겠지? 아니면 금융기관이 화폐 유동성을 늘리면 돼.
여기서 수출지원금융은 화폐량에 더해, 화폐 유동성을 크게 증가시켰는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한국은행이 이를 담당하다보니
1971년에 이르면 본원통화공급분 2882억원의 24.8%인 715억원이 수출지원금융을 위한 추가 발행이었어.
게다가 금융대상도 대폭 확대시키고 이에 대한 보증도 정부가 일부 담당하게 되면서 시장에 풀린 원화의 액수는 엄청나게 늘어나는 거야.
돈이 많이 풀리면 당연히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겠지?
2-3. 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71.2.9 ~ 1976.2.9)
대한민국 제 7대 대통령 박정희